일상 134

클로버(St. Patrick's Day)

오늘 아침 지하철에서 사람들의 옷차림으로 오늘이 성패트릭데이라는 것을 알았다. 볼리비아에서 온 23살의 미카엘라를 통해 2시에서 4시 5번가에서 퍼레이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몸은 무겁고 한기가 느껴졌지만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축제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표정의 풍성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가끔 궁금해질 때가 있다. 순진한 웃음과 벽을 허무는 대화 역시 그러하다. 해 맑은 아가의 웃음과 천진함은 두려움을 느낄 때부터 사라진다. 낯선 이를 향해 의심없이 웃던 아가가 어느 순간 불안과 공포 낯섦을 인지할 때 자지러지게 울게 된다. 이곳에 와서 느끼는 것은 이들의 얼굴은 그런 불안과 공포가 드물다. 눈이 마주치면 표정이 굳는 것이 아닌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간다. 순수가 갖는 힘을 그..

일상 2023.03.18

닿지 않는..

늘 그랬다. 무언가 새 일을 앞두거나 삶에 변화가 닥칠 때 난 언제나 앞서 두려워하고 불안해서 안절부절 못한다. 그 불안은 한 없이 마음을 침울하게 한다. 가라앉은 마음은 또다른 생각을 마음에 심어두고, 그 생각들은 나를 삼킬만큼 몸을 불려간다. 열심으로 새 일들을 해 나가겠지만 첫 발을 떼기가 이다지도 힘이 드는 일일까. 이런 나를 누구보다 잘 이해해준 사람이 있었지. 무심한 듯 다감했던 사람. 많이 그리워지는 밤이다. 한겨울에도 눈이 오지 않더니 3월 들어 눈이 잦다. 오늘은 비에 섞여 눈이 날렸다. 허공에서 일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뿐 지면에 닿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이 그에게 닿지 못하는 내 마음같아 안타까이 쳐다볼 수 밖에 없었던 무기력함. 일을 하면서도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던 오..

일상 2023.03.12

기억이라는 것은

기억이라는 것은 지각이라는 한 가지의 영역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신체의 오감, 전 영역을 차지한 부분이라 잊으려는 노력이 참으로 무용한 것이 된다. 카페에서 무심히 흘려나오는 노래 소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고, 모락모락 김이 나는 음식앞에서도 떠올려지는 얼굴이 있다. 계절이 느껴지는 피부에서도, 우연히 일어나는 헤프닝에서도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 달라붙은 껌딱지처럼 기억은 붙어 있다. 인생을 돌아볼 때는 그렇게 굴직굴직한 사건들이 남아 있건만 일상에서는 하찮은 지극히 사소한 것들이 마음을 흔든다. 교회집사님의 한국방문 소식은 낯선 감정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 낯설다 함은 오랜 일본생활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인 까닭이다. 나이를 먹어 그런 것일터이지만 아마도 이 마음은 애태우는 가슴이 그곳에 남아 있..

일상 2023.03.08

봄은 아프게 온다.

그날 밤 늦은 퇴근길에는 눈이 내렸다. 두 번째 내리는 눈은 첫눈의 경이와 환희가 없다. 첫 것이 주는 신비가 사라진 까닭이겠지. 쌓이는 눈은 소리가 없지만 몸에 부딪히는 눈은 탁탁 소리가 난다. 눈송이가 부서지는 비명인가보다. 그 소리가 제법 큰 것이 밤내 울음 울고, 슬픔은 하얗게 쌓여갈듯하다. 눈을 모르고 자랐다. 남부지방에서 대부분 살아온 때문도 있지만 추위에 약한 탓에 눈을 찾아 다닌 기억도 없다. 내 몸에 부딪혀오는 눈송이의 비명도 내게는 생경한 것이어서, 그렇게 큰 소리로 운다는 것도, 제법 뺨을 아프게 때려온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 어릴적 외갓집을 찾아갈 때 사방이 눈으로 쌓여 있었던 적이 있었다. 논과 나즈막한 언덕배기가 온통 하얗게 소금을 뿌려놓은 듯,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것이..

일상 2023.03.02

꿈을 말하는이유는.

분명 봄이 숨켜져 있는데 바람은 차다. 어제는 우박같은 싸리 눈이 내렸다. 사방에 적막이 내려앉았을 때 버스정류장 가림막 유리에 부딪히는 싸리눈은 앓는 소리를 냈다. 적요를 깨는 그 울음은 내뿜는 입김으로 내가 우는 것인지 싸리 눈이 우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사람이 내일을 바랄 때에 구색한 변명이 필요하다는 걸 아는 사람은 드물다. 돈에 궁한 삶이라 아이들에게 빚만큼은 물려주고 싶지 않아 빚 갚는 일이 살아야 할 이유가 되었다. 빚을 갚고 나니 날개죽지를 떠나지 못한 자식새끼가 있어 2년은 더 살아야한다는 변명도 굳이 옹색하진 않다. 그러다 나를 보니 까닭없이 설워져서, 나란 인생이 까닭없이 불쌍해서 그 2년을 지나 더 살고 싶어서 꿈을 꾼다. 지독히 살고 싶다. . 마음이 꺾이면..

일상 2023.02.24

그의 글에는 빗물이 스며있다.

그날은 미리 온 봄처럼 햇살이 들어 포근한 날이었다. 모처럼 off다보니 이것저것 할 것들이 있었지만 미루어 두기로 했다. 그렇게 가방을 매고 올라탄 지하철. 그때서야 어디로 갈지 망설여진다. 어디로 갈까... 한없이 몸이 곤해 쉬고 싶었다.모처럼의 햇살에 떠밀려 나왔지만 익숙치않은 환승이나 몸을 더 곤하게 하고 싶지 않다. 뉴욕은 한없이 넓고 본 것보다 보지 못한 것이 훨씬 많아 선택지가 많았지만 환승을 고려하지 않으니 대충 추려진다. . 그랜드센트럴역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st 패트릭대성당이 있다. 거기를 가보자. 록펠러 센터 맞은 편에 위치한 성당은 규모뿐 아니라 네오고딕양식으로 지어져 아름답기 그지 없다. 오로지 구글 라이브뷰를 통해 걷다보니 건물을 한바퀴 돌아서야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간..

일상 2023.02.18

책갈피 속 사진.

아마도 담양 메타세콰이어길이었던 것 같다. 마주잡은 손과 다감하게 바라보는 웃음 띤 얼굴. 무심코 펼친 책에서 팔랑이며 사진 한장이 떨어졌다. 잊혀지기를 거부한 얼굴이 거기에 있다. 그 사진 속 나는 지금 보다 젊었고,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했다. 눈물 짓는 날이 많았지만 그것보다 더 많은 날을 웃었다. 사랑스런 날만 남기기로 작정한 나라서 나는 모든 것이 그립고 모든 것이 안타깝다. . 처음 Bowne Park을 찾았을 때 연못정화공사로 펜스가 쳐져 있었다. 펜스 너머에는 어릴 적 보았던 수양버들이 초록가지를 연못속 자기 모습을 향해 줄기를 길게 길게 뻗어 있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났다, 그리고 어느새 봄을 품은 겨울이 지나고 있을 때 펜스가 사라졌다. 초록수양버들은 잎을 다 떨구고 어느새 황금..

일상 2023.02.11

온전히 나다운.

온전히 나다운 것이 무엇일까? 아마도 나 자신이 무리하지 않아도 되고 가장 편안한 상태일 때 그것이 가장 나다운 것 아닐까? 그렇다면 스스로 무리하지 않으며 마음이 편안하고 아니 유쾌할 수 있을 때는 언제일까? 비교적 오랜시간동안 청소년 사역을 할 때가 가장 나답다 여겼다. 아이들과의 시간이 즐거웠고, 그들을 성장시키는 일에 보람을 느꼈다. 아마도 내 인생의 주기율표중 가장 빛나고 아름다웠던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을 지키고 누리기 위해 또다른 시간은 마음 졸이고 스스로를 옥죄며 무리할 수 밖에 없었던 시간이 있었다. 나의 순수한 열정과 달리 굽은 시선속에 입술을 깨물어야 할 때도 있었고, 내 삶의 다른 한 부분을 내려놓기도 해야했다. 지금와 생각해보면 그 시간으로 충분했지만 나는 분명 무..

일상 2023.02.03

너와 나는 다르다는 이름으로.

kxx. 난 아직 이 이름만 보면 오그라드는 가슴과 진정되지 않는 마음이 된다. 오늘도 그랬다. 모처럼 sns을 하면서 보고픈 이들의 소식을 스트롤하다 이 이름을 발견했다. 그녀와 나는 한 공동체에 있었는데 제법 규모가 커서 같은 소속이 아니면 얼굴 조차 알지 못했다. 내가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그 공동체를 떠날 무렵으로, 나의 치부를 캐어 까발리는 것이 자신의 의무인 것처럼 보이지않는 압력그룹으로 나를 압박해오는 중심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녀의 정의는 사실이다. 나는 이혼녀였고, 그녀는 한 남편의 아내이자 엄마였으니까. 또한 성경에는 이혼에 관한 엄중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으니 그녀의 말대로 나는 죄질이 나쁜 자격미달의 사역자임이 틀림없다. 그녀는 이런 나에게 자신의 아이를 맡길 수 없으니 나의..

일상 2023.02.02

삶의 한 가운데서 죽음을 노래하라.

"뉴욕은 이렇게 비가 자주 내리나요?" 나의 물음에 눈이 와야할 때 비가 내리니 오히려 다행이지 않으냐고 되물어오는 사람들. 그러게 한국에서 들려오는 한파소식이나 미국 곳곳에서 들리는 폭설에 비하면 불평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쨍한 날이 되면 마음이 조급해진다. 해가 있는 동안 조금이라도 걷고 싶은 마음. 찬바람에 두 뺨은 얼얼해져도 햇살아래 곤한 몸을 말리고픈 마음이 든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지하철을 탓다. 기차나 버스에 비하면 불미스러운 일이 잦아 가급적이면 지하철을 타지말라는 주의를 들었지만 저렴한 교통비를 생각한다면 어쨋든 용기를 내어볼 일이다. 다행이 이용할 시간대가 출근 시간과 해지기 전이니 충분히 이용가치가 높다. 오늘은 시험삼아 목적지의 반까지 타고 되돌아 오는 연습을 했다. 처음은 늘..

일상 2023.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