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너와 나는 다르다는 이름으로.

huuka 2023. 2. 2. 01:31

kxx. 난 아직 이 이름만 보면 오그라드는 가슴과 진정되지 않는 마음이 된다. 오늘도 그랬다. 모처럼 sns을 하면서 보고픈 이들의 소식을 스트롤하다 이 이름을 발견했다. 
그녀와 나는 한 공동체에 있었는데 제법 규모가 커서 같은 소속이 아니면 얼굴 조차 알지 못했다. 내가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그 공동체를 떠날 무렵으로, 나의 치부를 캐어 까발리는 것이 자신의 의무인 것처럼 보이지않는 압력그룹으로 나를 압박해오는 중심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녀의 정의는 사실이다. 나는 이혼녀였고, 그녀는 한 남편의 아내이자 엄마였으니까. 또한 성경에는 이혼에 관한 엄중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으니 그녀의 말대로 나는 죄질이 나쁜 자격미달의 사역자임이 틀림없다. 그녀는 이런 나에게 자신의 아이를 맡길 수 없으니 나의 사임을 강력하게 주장해왔다. 그 이유때문은 아니었지만 나는 사역지를 이동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페이스북을 통해 처음 보았다. 많은 이력을 자랑하듯 그녀의 프로필은 장황했다. 또한 좋은 활동역시 역동적으로 하고 있었다. 사역을 내려놓고 그녀의 정죄가 멈추었냐하면 결코 아니다. 나의 실체를 고발하는 그녀의 열심도 나의 팔로워가 늘어나는 만큼 더해졌고, 그녀와 나는 친구가 아니었지만 공친의 수는 팔로워의 반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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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사건에는 다면적인 원인이 있다. 그녀의 날선 정죄도 비단 나의 이혼력때문만은 아니겠지. 다른 여러가지가 작용해서 그녀에게 그런 열심을 갖게 했겠지만, 표피적인 관계라도 맺은 사이라면 또다르겠지만,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가해지는 그녀의 의로움은 가학적이다. 누가 그녀에게 내 인생의 심판자 역할을 부여한 것일까? 이혼의 경력이 한 남자의 아내로 살아가는 이에게 정당함과 의로움을 선물하는 것인가? 인생을 살아가며 거듭 넘어지는 사람에게는 너는 그런 사람이야라고 말할 이유는 어디에서 찾는 것일까? 열심히 살아온 인생이 당신들 수다상의 도마에 횟거리로 전락시킬 권한은 누가 부여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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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하찮은 그들은 절름발이 인생을 가져다 자신들의 온전한 삶을 정의라 부른다. 결코 내 삶이 잘났다 말함이 아니라 굴곡진 내 삶을 통해 당신들이 할 수 없는 것을 이 세상에 기여하고 살아갈지 누가 아는가?. 그들보다 선을 더 행했거나 정의를 실현했다는 말또한 결코 아니다. 다만 내 인생은 당신의 정의를 증명하기 위한 재료로 사용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장 쉬운 방법으로 조악하게 자신의 삶을 자랑하는 그녀와 동조하며 더불어 자신의 정의를 내세우는 무리에 구역질이 난다. 나는 여전히 이 세상에서는 고개숙인 부끄러운 사람이고, 한 사람의 인생을 끊임없이 물어 뜯어되는 가학적인 그들은 하하 호호 유쾌한 승리한 삶이라 자축한다. 그들이 팔아먹는 예수 이름으로 나를 정죄하지말고 자신을 바라보길 바랄뿐. 나의 부족함과 나의 의롭지 못한 부끄러움은 하나님앞에서 고스란히 내몫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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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왔고, 나는 우산을 쓰고 길을 걸었다.
긴 시간 내린 비로 나무는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내린 빗방울이 벗겨져나온 나뭇껍질에 위태롭게 달려 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한참을 보고 있었는데 그것이 내린 빗방울인지, 그것이 나무의 몸에서부터 스며나온 눈물인지 이내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내 몸안 한 지점에서 얼어붙은 뺨으로 따스한 물방울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닦지 않았다. 조금은 짭짤한 따뜻한 방울물이 나를 다독이는 듯해. 그냥 내버려두기로 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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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녀가 결코 불의한 여자는 아니지 않은가?  20년을 이혼녀의 딱지를 붙이고 살았다. 그것은 재혼을 하고도 떼어지지 않는 마법딱지였다. 오랫동안 한 사람의 아내 남편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소중하고 그 가정이 귀하다. 그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복되다. 하지만 그 이유로 어느 누구의 아내도 되지 못하고 아이들에게 온전한 가정을 제공해주지 못한 편부모로 살아가는 이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며 가쉽거리로 삼는 일은 시대착오적이고 잘못되었다. kxx 부디 당신의 악행을 이제는 멈추길 바란다. 나를 위한 변명도 나를 위한다는 말도 그만 멈추어주길 바란다. 나 자신이 내 삶을 변명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는데 당신들이 어떻게 내 속내를 알아서, 그간의 사정을 알아서, 나를 변호해 준단 말인가. 변호와 위함을 가장한 정죄또한 신물이 난다. 당사자인 내가 하나님께 거듭 묻는거다. 이런 내가 뭘할 수 있는지. 왜 살아야하며, 왜 여전히 사역의 환경속에 두시는가를...아마도 하나님 앞에 설 때의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일을 할 때 한계를 느끼게 되는 육체의 고통이 내가 감당해야하는 그분의 형벌이라면 나는 이미 그 죗값을 치르고 있다. 그러니 부디 나를 염려말아주길....

볕드는 자리에 비가 걷히자 매화가 벙글거린다.
선비들이 느낀 짙은 암향은 느낄 수 없지만 한기 서린 날 또렷이 자신을 드러낸 꽃망울은 암향보다 짙은 존재감을 드러낸다.아직도 겨울의 한중간을 지나고 있는데 이들은 어이하여 벌써 몸을 열어 자신을 드러낸 것일까.작은 얼굴로 애써 자신의 모습을 감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대의 맑고 흰 얼굴은 감출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꽃잎 열어 드러낸 여러갈래의 작은 수술들이, 지나가는 이들에게 손짓하고 초록 가지에 매달린 앙징맞은 꽃봉오리의 사랑스러움이 눈을 앗아간다. 나는 늘 이렇게 철을 잊은 서두름앞에 많이 당황하게 된다. 그 모습이 내모습같아서. 내 삶을 닮아 있어서 말이다. 조금만 더 견디다가 꽃망울을 터뜨릴 것이지, 이 추위만 한풀 꺾이면 되는데 그걸 못 기다린 것일까 하여 더 안타까운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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