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가문비나무

huuka 2022. 12. 20. 12:50

한여름에도 은빛이 감도는 가문비나무. 그 아래에 서면 서늘함이 느껴졌다. 은푸른 빛은 벼린 칼날처럼 차갑고 날카롭다. 그것이 나는 좋다. 나무가 주는 한기(寒氣)가 마치 다른 나무들과는 어울리기를 포기한 혼자만의 고독처럼. 자기만의 시간과 자기만의 공간을 가진 나무의 이기가 마음에 든다. 세상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혼자서도 충분하다는 그 의엿함이 부러웠는지도 모른다. 첫 눈이 내린 날 서둘러 바우니 공원을 찾았다. 딱 한 그루. 바우니 공원에는 많은 낙엽수들이 이미 잎을 떨구고 맨가지를 드러낼 때조차 뾰족한 잎의 은푸른 빛을 잃지 않은 가문비나무가 있다. 첫 눈을 맞은 가문비나무는 신비로운 은빛이 더 깊어져 숲의 모든 색들을 반사하는 반사경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이미 해는 정수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으니 melting point를 지나 쌓인 눈은 날카로운 잎의 가느다란 몸둥이에 물방울로 맺혀 있다. 세상 그 어떤 보석이 이처럼 영롱하고 아름다울수 있을까. 극상의 아름다움은 선 자리에서 한걸음 더 가까이 허락하지 않는 경계가 느껴진다. 충분하다. 적당히 바라볼 수 있는 이 거리에서의 가문비나무. 나무와 나와의 그 적당한 거리로 충분하다.
.
가문비나무의 꽃말이 "불운속의 희망"이라던가?
꽃말을 듣고선 피식 웃음이 났다. 불운속 희망. 불운 속 희망이 과연 진짜 희망일까? 불운 속에서 갖는 희망은 최선이 아닌 차선 아닌가? 불운 속에서 희망을 고대하고 살아가는 인생이 얼마나 고된지 꽃말을 붙인 이들은 알고 있는 것일까. 평생 불운을 타고나 선택하는 것마다 절망을 선택하고 마는 인생도 있다. 인생의 쓴맛을 보았다면 좀더 신중히 다음 행보를 걸을 수도 있겠지만 결코 그렇지 못하다. 그 쓴맛의 뒤는 오래도록 남아 선택의 순간 굽은 손을 만들어 희망에는 닿을 수 없는 불행을 선택하게 만든다.아니 오래도록 불운한 사람은 희망이 어색하다. 그 어색함은 두려움을 갖게 하니 결국 익숙한 불운을 선택할수밖에 없지 않은가. 불운은 불운 속 그 사람을 닮아 있다.
.
바람이 차다. 찬 바람에 감기 걸릴까 걱정되는 사람은 있어도 나를 걱정하는 이는 없다. 그래서 슬픈 까닭인지 알 길 없지만 이제는 그 슬픔에도 익숙해져 간다. 이질감속에 평생을 살아왔다. 이해받길 원했지만 언제나 나의 이해가 짧아 다른 이의 이해를 받지 못했다. 원망하고 탓한 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열심히 사랑을 했다. 하지만 사랑받는 법을 몰랐다. 그래서 내겐 사랑은 열심히 했지만 언제나 사랑이 멀다. 불안한 요즘이다. 동성애로 인한 교단 분리문제로 새우등이 터질 것만 같다. 신앙도 신념도 명분도 아무런 상관없다. 내게는 버텨야 하는 시간이 있고, 그 시간만큼은 보장받고 싶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을 듯하다. 이곳에 와 매일이 불안했지만 요즘은 그 불안을 어찌할 방법이 없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까닭일터이지만...
.
사시사철 은빛 푸르름을 지닌 가문비나무는 때때로 울음을 울게 되는데 그 울음은 명장의 손에 의해 바이올린으로 만들어지고 부드러운 현으로 달래주면 그렇게 아름다운 노래로 바뀌게 된다고 한다. 나의 울음은 결코 노래로 바뀔 일이 없겠지만 음표처럼 새겨진 설움은 울음으로 드러나고 흐르는 눈물은 손가락으로 현을 튕기듯 튕기게 된다. 계절이 깊어가고 밤도 짙어진다.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와 나는 다르다는 이름으로.  (0) 2023.02.02
삶의 한 가운데서 죽음을 노래하라.  (1) 2023.01.28
오늘처럼 비가 내리면.  (0) 2022.12.17
3줄21단어72자  (0) 2022.12.12
시간이 기르는 밭  (0) 2022.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