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온전히 나다운.

huuka 2023. 2. 3. 09:40

온전히 나다운 것이 무엇일까? 아마도 나 자신이 무리하지 않아도 되고 가장 편안한 상태일 때 그것이 가장 나다운 것 아닐까? 그렇다면 스스로 무리하지 않으며 마음이 편안하고 아니 유쾌할 수 있을 때는 언제일까? 비교적 오랜시간동안 청소년 사역을 할 때가 가장 나답다 여겼다. 아이들과의 시간이 즐거웠고, 그들을 성장시키는 일에 보람을 느꼈다. 아마도 내 인생의 주기율표중 가장 빛나고 아름다웠던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을 지키고 누리기 위해 또다른 시간은 마음 졸이고 스스로를 옥죄며 무리할 수 밖에 없었던 시간이 있었다. 나의 순수한 열정과 달리 굽은 시선속에 입술을 깨물어야 할 때도 있었고, 내 삶의 다른 한 부분을 내려놓기도 해야했다. 지금와 생각해보면 그 시간으로 충분했지만 나는 분명 무리하고 있었고 내가 아닌 좀더 괜찮은 사람으로 포장해야만 했던 때인듯하다. 이곳에와서 참 바쁘게 지냈다. 이곳저곳 다니지도 못하고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에 집중했다. 물론 나다닐 여건도 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못 다닐 것도 아니었건만 잊고 싶은 것이 많은 만큼, 그렇게 다른 일에 골몰하게 되더라. 어젯밤 문득 굳이 이렇게 살 이유가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해 보고 싶었다. 내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나다운 모습으로 있을 수 있는 곳을 찾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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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함께인 시간은 오롯이 나로서 충분한, 그러기에 온전히 유쾌할 수 있는 나다운 시간인듯하다. 사락사락 책장을 넘길 때 생기는 종이바람은 얼굴에 있는 모든 감각을 불러 일으킨다. 파다닥 책을 세워 빠르게 넘기면 그 스피드에 맞춘 안타까운 종이내음이 코안 점막에 닿는다. 모든 시각은 넘어가는 페이지사이사이 남실거리는 단어들을 쫓아가고 손가락과의 마찰을 통해 일어나는 바람은 뺨의 세포를 긴장시킨다. 아. 드디어 내가 책들의 세상으로 발걸음을 옮겨놓게 되는구나. 세상은 사라지고, 나를 향한 날선 눈들도 빙글빙글 돌아간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나를 흔들수 없는 오롯한 나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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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이면 제일 큰 곳으로 가자싶어 "미국 최대 서점"을 검색하니 Barnes & Noble 이 나온다. 지하철로 20정류장 가서 환승해 4정거장이다. 두려움은 한밤이면 충분하다. 아침 일찍 서둘러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출근시간이 막 지난터라 한산하다. 창밖으로 낯선 풍경들이 지난다. 환승을 해야는데....잘할 수 있을까... 다행히 Union Sq역까지는 아무거나 타도 되어 쉽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구글 스카이뷰를 통해 1시간 20분만에 서점에 도착했다.

아. 건물조차 너무 아름답다. 공사중인것이 아쉽지만 건물부터 내마음에 쏙 드는 것이 용기 내기를 잘했다.

1층에는 베스트셀러와 음반 굿즈제품들이 놓여있고. 2층은 어린이코너. 3층은 스타벅스가 입점해있어 북카페로 운영되고 있었다. 4층은 각종 문학서들이 진열되어 있다. 책을 좋아하는 것인지 굿즈제품들을 좋아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아니다. 분명 책을 좋아하지만 전부 영어로 적혀 있어, 내게는 음..다 핑게고 예쁜 굿즈상품들이 많았다. 나는 카드 2장을 구입해 커피한잔을 마시며 가지고 간 미야지 나오코의 "상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에세이를 펼쳤다. 정오의 햇살을 따뜻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이들의 도란도란 이야기는 백색소음마냥 잠을 부른다. 이 여유가. 이 따스함이 좋다. 이곳을 사랑하게 될 것 같다. 볼펜을 꺼내 구입한 카드로 딸아이에게 편지를 적었다. 보통 우편으로 보내면 또 언제 아이의 손에 닿을지 알 길 없지만 이런 느림도 꽤 낭만적이다.

그리고 나는 메리 올리버를 만났다. 그랬다. 언젠가 그녀의 책(원서)을 꼭 내손으로 만지게 될 것 같았다. 그녀의 시를 원문 그대로 읽고 나의 언어로 또 그 언젠가 옮겨 적을 날이 있을거라는 것. 그 날을 기대하면서 천 개의 아침 (A Thousand Morning)을 구입했다. 아침이 밝아오는 다채로운 빛깔의 하늘표지를 입은 한글번역서와 비교해 너무나 수수한 책. 누르스름한 종이에 타이핑하고 출력제본한 듯 우리나라의 문교본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가격은 17불. 한역본 1만3천원과 비교해도 비싼 가격이다. 여유가 생길 때마다 한권 씩 사 모으면 언젠가는 그녀의 전작을 소장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한나절의 행복이었지만 내일부터 힘든 주말을 견뎌낼 수 있는 충분한 쉼이 되었다. 역시 책은 행복을 준다. 또한 메리 올리버를 만났다면 두말 할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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