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그의 글에는 빗물이 스며있다.

huuka 2023. 2. 18. 00:18

그날은 미리 온 봄처럼 햇살이 들어 포근한 날이었다. 모처럼 off다보니 이것저것 할 것들이 있었지만 미루어 두기로 했다. 그렇게 가방을 매고 올라탄 지하철. 그때서야 어디로 갈지 망설여진다. 어디로 갈까...
한없이 몸이 곤해 쉬고 싶었다.모처럼의 햇살에 떠밀려 나왔지만 익숙치않은 환승이나 몸을 더 곤하게 하고 싶지 않다. 뉴욕은 한없이 넓고 본 것보다 보지 못한 것이 훨씬 많아 선택지가 많았지만 환승을 고려하지 않으니 대충 추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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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센트럴역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st 패트릭대성당이 있다. 거기를 가보자. 록펠러 센터 맞은 편에 위치한 성당은 규모뿐 아니라 네오고딕양식으로 지어져 아름답기 그지 없다. 오로지 구글 라이브뷰를 통해 걷다보니 건물을 한바퀴 돌아서야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간단한 가방 검문을 하고서 실내로 들어설 수 있었는데 미사를 위한 예배당이기보다 마치 관광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듯 사진을 찍는 이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뭐랄까? 그러한 기능에도 불구하고 공간이 주는 경건과 위엄은 사뭇 둘러보는 이들의 옷깃을 여미게 하고 많은 말보다 숙연한 마음속 발원의 자리로 이동시킨다.

고해성사를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이 보였고,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파이프 오르간과 벽을 둘러 자리한 각각의 성상앞에는 초와 향이 준비되어 있어 몇몇은 불을 붙이고 손을 모았다. 나는 불현듯 알 수 없는 슬픔이 내려와 가방을 내리고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한사람 한사람의 히스토리가 스며있는 기도단은 이미 종교나 인종과는 관계없었다. 다만 사람의 간절함과 안타까움이, 고통속에서도 잃지 않은 소망이 겹겹히 쌓여 있다. 나역시 이방의 제단앞에서 눈물을 훔치며 마음속 애절함으로 기도를 올린다. 다만 건강하길, 다만 잘 견뎌주기를 다만 잊지 않기를 그리고 잊혀지지 않기를 ....
출구 한편에 마련된 gift shops에서 점심 대신 14불을 주고 부적을 사듯 팔찌묵주와 bookmark를 샀다. 많은 이들의 기도가 쌓여있는 이곳의 물건이니 이곳에서의 내 삶을 지켜줄 것만 같으니 헛될지라도 가치있는 소비이리라.

화려한 트리로 유명한 록펠러센터, 해가 바뀌었으니 당연히 트리가 철거되었고, 실외 아이스링크장에는 스케이트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맘때면 한국에는 동백이 한참이라 동백이 보고 싶어 '뉴욕에서 동백 볼 수 있는 곳'으로 검색을 해 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동백을 만났다. 록펠러 센터앞 분수대 정원에 동백이 피어있다. 뉴욕에서 마주하는 동백은 작고 앙징맞다. 작아서 더 소중한 동백. 동백은 그리움으로 꽃잎을 지어 송이를 만들었구나. 영문 이름은 더 예쁘다. Camellia. 카멜리아를 입에 처음 올린것은 동백이라는 의미보다 부산과 일본을 오가는 여객선이름으로 접했다. 1990년 카메리아를 타고 일본으로 갔다. 동백꽃에 올라 고국을 떠났고, 30년이 훅 지난 지금 또다른 타국에서 동백을 통해 고국을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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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글에서 스며있는 빗줄기를 발견한다. 일절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로 다짐을 한듯 적힌 한자한자마다 주먹을 쥔 힘이 느껴지고 그 다짐이 무너질까 서둘러 적기를 마무리한 짧은 글을 읽는다. 두 문단, 6문장의 글. 나의 안녕과 건강을 비는 글에서 지난한 삶의 고독과 체념은 비처럼 눅눅히 매여있다. 한 자 한 자 나는 지독히 천천히 읽었고, 다시금 말들을 주워 입에 넣고 씹는다. 단어들은 이사이에서 부서지고 단어에 스며든 모든 것들은 이 사이를 지나 혀를 적셨다. 마지막으로 혀로 이 사이사이를 훓어 그것들을 삼킨다. 이로서 하나가 되었다는 안도감. 하늘과 땅의 내음이 섞인 비. 삼킨 글에서 비냄새가 난다. 나는 그 맛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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