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봄은 아프게 온다.

huuka 2023. 3. 2. 10:28

그날 밤 늦은 퇴근길에는 눈이 내렸다. 두 번째 내리는 눈은 첫눈의 경이와 환희가 없다. 첫 것이 주는 신비가 사라진 까닭이겠지. 쌓이는 눈은 소리가 없지만 몸에 부딪히는 눈은 탁탁 소리가 난다. 눈송이가 부서지는 비명인가보다. 그 소리가 제법 큰 것이 밤내 울음 울고, 슬픔은 하얗게 쌓여갈듯하다. 눈을 모르고 자랐다. 남부지방에서 대부분 살아온 때문도 있지만 추위에 약한 탓에 눈을 찾아 다닌 기억도 없다. 내 몸에 부딪혀오는 눈송이의 비명도 내게는 생경한 것이어서, 그렇게 큰 소리로 운다는 것도, 제법 뺨을 아프게 때려온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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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외갓집을 찾아갈 때 사방이 눈으로 쌓여 있었던 적이 있었다. 논과 나즈막한 언덕배기가 온통 하얗게 소금을 뿌려놓은 듯,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것이 윤슬같았다. 빛들의 반짝임 사이를 한 줄로 걸어가던 엄마와 나 그리고 언니. 질식할 것 같은 하얀 세상은 가뜩이나 버거운 거리만큼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앞서 걸어가던 엄마는 체근하기도 지쳤는지 나를 당신의 등에 업으셨다. 그때 나는 엄마에게 어떤 미안함이나 고마운 마음도 없었다. 그냥 그 길이 지루했고, 질척거리는 자리며 눈이 얼어버린 자리를 피해 걸어야하는 수고가 고통스러웠을뿐이었으니까. 나를 업고 얼마간을 걸은 엄마는 하얀 입김을 반짝이는 눈속에 뱃으며 나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을 걷어 동그랗게 말아 입에 넣었다. 가볍지 않은 나를 업고 걸으며 목이 마르셨던 모양이다. 나는 엄마를 따라 눈을 뭉쳐 입에 넣어보았다. 차가운 눈은 입안에 들어가자마자 하찮게 녹아내렸다. 얼마를 넣어야 물을 마시듯 목젖을 적실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했고, 눈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것 같다. 빨갛게 언 볼에 뭉쳐 넣은 눈에는 콧물의 짭짤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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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엄마는 그 먼 길을 걸으며 당신의 엄마를 만나는 가는 길이라 행복했을까. 나는 그 날의 엄마에게 미안하고 그립다.


밤새 눈은 앓는 소리도 없이 쌓여만 간다. 모든 물줄기를 끌어올려 가지 끝 새생명을 내어놓은 그 자리, 봄을 기다리는 여린 생명위에 앙칼지게 쌓였다. 봄은 이다지도 아프게 온다. 어리숙하고 어린 것들은 늘 이렇게 생명의 위협속에 있는 것이 자연의 법칙인가보다. 그런 까닭에 손을 모으고 기도하게 되지. 태양이 높이 떠오르기를, 어머니의 내민 등과 같은 대지가 빨리 따뜻함을 회복하기를.

오늘 하늘은 짙은 코발트색이다. 쌓인 눈은 태양빛 아래 형태를 바꿔 땅으로 땅으로 스며 들어가겠지. 얼어 붙었던 대지는 다시 녹으면서 틈을 만들고 그 틈 사이 나무뿌리는 힘있게 몸을 불려갈거야. 여기저기서 틈을 벌여가느라 까인 나무뿌리의 비명은, 자신과 가장 멀리 있는 가지 끝 꽃봉우리까지 물줄기가 닿을 때 환성으로 바뀐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만, 봄은 여전히 고통스럽고 아프기만 하다. 그런 까닭에 나의 봄도 아프다는 것을 미리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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