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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닭.

모질어 지기 싫어서, 원망하고 싶지 않아서,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틀어지거나 무너지거나 더이상 일으켜 세울 것도 없이 깨져 버린 인생을 조각보 깁듯 기워가는 것이 더 비참할듯하여 깨진 홈을 메우고 갈라진 금을 지워버리는 것을 상상했는지도 모른다. 고이기도 전에 터져나오는 많은 말들 때문에 오히려 글을 쓸 수 없는 시간을 지났다. 글이 가진 그 위력을 알기 때문에 서슬 퍼런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저 주억거리며 삼키는 삶.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는 것이 오히려 살겠더라. 아직도 남은 마음의 그 무엇이 미련일지라도 미움보다 사랑이 낫지 않은가. . 스튜디오형 집 창문에 작은 에어컨이 달려 있는데 비가 올 때마다 타닥타닥 거리는 빗소리가 마치 처마에 빗방울 떨어지는 듯 해 마음은 더욱 ..

일상 2023.05.08

때로는 그리움도 지친다.

그리움은 안타까움을 원료로 삼는다. 안타까움은 간절한 마음을 원료로 한다. 간절함은 닿을듯 말듯한 아슬함이 팔할이다. 즉 어느정도의 가능성이 느껴질 때 간절함은 깊어지고 채워지지 않는 부분에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 가능성들이 점점 희박해지고 그 어떤 기미도 느껴지지 않을 때는 그리움이 아닌 절망에 빠지게 된다. 절망으로 가는 길목. 그리움이 지친다. 누군가의 오래전 사진을 보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젊은 날의 그 사람. 어설픔에서 느껴지는 순진함이 낯선 얼굴에서 익숙함으로 다가왔다. 언젠가 나역시 빛 바랜 사진으로 그의 기억에 자리하게 될까... 같은 시각에 탄 지하철이 오늘따라 길게만 느껴지는 것은 삶이 지쳐서가 아닌 그리움이 지쳐서이겠지. 마음이 어지럽다. 봄이구나 잔인한 4월이구나.

카테고리 없음 2023.04.26

연초록빛 너머를 볼 수 있을까.

그냥 그렇게 스쳐 지나가지 않았다. 분명 자신의 시간에 자신의 족적을 뚜렷이 남긴다. 그것이 봄이다. 봄이 사라진다면 여름은 오지 않을 것이고 가을이 겨울 또한 오지 않겠지. 그래서 연초록빛 너머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생명의 경이를 깨닫고 성장 소멸의 과정을 봄을 통해 바라본다. 잔인한 4월이, 아픔의 흔적만 가득했던 시간이 지난다. 그렇게 천년같은 한해가 지났다. 비가 잦다고 불만가득했던 입술이 옹색해지듯 하루가 다르게 물기를 머금은 잎사귀는 풍성해지고 닿지 않았던 마른 손들이 도로를 지나 어깨를 두른다. 분명 오지 않을 듯한 봄이 온 것이다. 지나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이 어느새 한해가 지난 것이다. 나는 여전히 그 때 그 자리에 서 있는데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변한다. 한기 든 마음을 누..

일상 2023.04.22

두고 온 봄.

경상도에서 자란 나는 어릴 적 아버지말씀 때문에 전라도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경상도 번호판을 단 차를 보면 차를 훼손한다는 둥 이런저런 말들이 지역감정을 부추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아니 전라도 출신들과는 교제조차 드물었던 내가 전라도에서 몇 년을 살게 되었다. 그것도 방구석에서 시간을 죽인 것이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전라남도 곳곳을 다니며 사계절을 보냈다. 계절마다 산과 들이 어떻게 색들을 바꿔 입는지. 몸을 불렸다 몸을 쇠하여 가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그것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보냈다. 지금은 낯선 이역 땅에서 가장 그리운 것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의 성장 대부분을 보낸 경상도 땅이 아닌 전라도 땅이. 그 산과 강이 잿빛을 띄는 바다가 미치도록 그립다. . 뉴욕의 날씨는 ..

카테고리 없음 2023.04.06

클로버(St. Patrick's Day)

오늘 아침 지하철에서 사람들의 옷차림으로 오늘이 성패트릭데이라는 것을 알았다. 볼리비아에서 온 23살의 미카엘라를 통해 2시에서 4시 5번가에서 퍼레이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몸은 무겁고 한기가 느껴졌지만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축제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표정의 풍성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가끔 궁금해질 때가 있다. 순진한 웃음과 벽을 허무는 대화 역시 그러하다. 해 맑은 아가의 웃음과 천진함은 두려움을 느낄 때부터 사라진다. 낯선 이를 향해 의심없이 웃던 아가가 어느 순간 불안과 공포 낯섦을 인지할 때 자지러지게 울게 된다. 이곳에 와서 느끼는 것은 이들의 얼굴은 그런 불안과 공포가 드물다. 눈이 마주치면 표정이 굳는 것이 아닌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간다. 순수가 갖는 힘을 그..

일상 2023.03.18

닿지 않는..

늘 그랬다. 무언가 새 일을 앞두거나 삶에 변화가 닥칠 때 난 언제나 앞서 두려워하고 불안해서 안절부절 못한다. 그 불안은 한 없이 마음을 침울하게 한다. 가라앉은 마음은 또다른 생각을 마음에 심어두고, 그 생각들은 나를 삼킬만큼 몸을 불려간다. 열심으로 새 일들을 해 나가겠지만 첫 발을 떼기가 이다지도 힘이 드는 일일까. 이런 나를 누구보다 잘 이해해준 사람이 있었지. 무심한 듯 다감했던 사람. 많이 그리워지는 밤이다. 한겨울에도 눈이 오지 않더니 3월 들어 눈이 잦다. 오늘은 비에 섞여 눈이 날렸다. 허공에서 일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뿐 지면에 닿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이 그에게 닿지 못하는 내 마음같아 안타까이 쳐다볼 수 밖에 없었던 무기력함. 일을 하면서도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던 오..

일상 2023.03.12

기억이라는 것은

기억이라는 것은 지각이라는 한 가지의 영역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신체의 오감, 전 영역을 차지한 부분이라 잊으려는 노력이 참으로 무용한 것이 된다. 카페에서 무심히 흘려나오는 노래 소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고, 모락모락 김이 나는 음식앞에서도 떠올려지는 얼굴이 있다. 계절이 느껴지는 피부에서도, 우연히 일어나는 헤프닝에서도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 달라붙은 껌딱지처럼 기억은 붙어 있다. 인생을 돌아볼 때는 그렇게 굴직굴직한 사건들이 남아 있건만 일상에서는 하찮은 지극히 사소한 것들이 마음을 흔든다. 교회집사님의 한국방문 소식은 낯선 감정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 낯설다 함은 오랜 일본생활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인 까닭이다. 나이를 먹어 그런 것일터이지만 아마도 이 마음은 애태우는 가슴이 그곳에 남아 있..

일상 2023.03.08

봄은 아프게 온다.

그날 밤 늦은 퇴근길에는 눈이 내렸다. 두 번째 내리는 눈은 첫눈의 경이와 환희가 없다. 첫 것이 주는 신비가 사라진 까닭이겠지. 쌓이는 눈은 소리가 없지만 몸에 부딪히는 눈은 탁탁 소리가 난다. 눈송이가 부서지는 비명인가보다. 그 소리가 제법 큰 것이 밤내 울음 울고, 슬픔은 하얗게 쌓여갈듯하다. 눈을 모르고 자랐다. 남부지방에서 대부분 살아온 때문도 있지만 추위에 약한 탓에 눈을 찾아 다닌 기억도 없다. 내 몸에 부딪혀오는 눈송이의 비명도 내게는 생경한 것이어서, 그렇게 큰 소리로 운다는 것도, 제법 뺨을 아프게 때려온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 어릴적 외갓집을 찾아갈 때 사방이 눈으로 쌓여 있었던 적이 있었다. 논과 나즈막한 언덕배기가 온통 하얗게 소금을 뿌려놓은 듯,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것이..

일상 2023.03.02

꿈을 말하는이유는.

분명 봄이 숨켜져 있는데 바람은 차다. 어제는 우박같은 싸리 눈이 내렸다. 사방에 적막이 내려앉았을 때 버스정류장 가림막 유리에 부딪히는 싸리눈은 앓는 소리를 냈다. 적요를 깨는 그 울음은 내뿜는 입김으로 내가 우는 것인지 싸리 눈이 우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사람이 내일을 바랄 때에 구색한 변명이 필요하다는 걸 아는 사람은 드물다. 돈에 궁한 삶이라 아이들에게 빚만큼은 물려주고 싶지 않아 빚 갚는 일이 살아야 할 이유가 되었다. 빚을 갚고 나니 날개죽지를 떠나지 못한 자식새끼가 있어 2년은 더 살아야한다는 변명도 굳이 옹색하진 않다. 그러다 나를 보니 까닭없이 설워져서, 나란 인생이 까닭없이 불쌍해서 그 2년을 지나 더 살고 싶어서 꿈을 꾼다. 지독히 살고 싶다. . 마음이 꺾이면..

일상 2023.02.24

그의 글에는 빗물이 스며있다.

그날은 미리 온 봄처럼 햇살이 들어 포근한 날이었다. 모처럼 off다보니 이것저것 할 것들이 있었지만 미루어 두기로 했다. 그렇게 가방을 매고 올라탄 지하철. 그때서야 어디로 갈지 망설여진다. 어디로 갈까... 한없이 몸이 곤해 쉬고 싶었다.모처럼의 햇살에 떠밀려 나왔지만 익숙치않은 환승이나 몸을 더 곤하게 하고 싶지 않다. 뉴욕은 한없이 넓고 본 것보다 보지 못한 것이 훨씬 많아 선택지가 많았지만 환승을 고려하지 않으니 대충 추려진다. . 그랜드센트럴역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st 패트릭대성당이 있다. 거기를 가보자. 록펠러 센터 맞은 편에 위치한 성당은 규모뿐 아니라 네오고딕양식으로 지어져 아름답기 그지 없다. 오로지 구글 라이브뷰를 통해 걷다보니 건물을 한바퀴 돌아서야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간..

일상 2023.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