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손 맛!

huuka 2023. 9. 27. 22:53

계절이 바뀌는 모퉁이에는 고여있는 눈물을 발견한다.
연이어 비가 왔다. 그리고 기온은 툭 떨어지고 가을이 어느새 다가와 있다. 새로운 계절이 오기 전 지독한 계절앓이를 하는 나는 내가 아픈줄 알았다. 하지만 오고가는 계절이 그렇게 아팠나보다. 떠나는 계절은 이별 앞에서, 오는 계절은 날것의 불안으로 몇날의 비로 두려움을 떨쳐버리려 했는지도 모르지.. 일년에 4번,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시간을 합하면 한계절의 이별쯤이야 아무것도 아닐것인데 나는 매번 이 계절이 처음인양 앓이를 한다. 
.
늘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관성의 법칙은 쇼핑리스트에서도 발견된다. 몇일 전 주문한 샤프가 도착하자마자 손에 쥐어보았다. 그립감이라는 말은 낯설다. 차라리 손맛이라 쓰자. 손끝에서 느껴지는 짜릿함은 펜촉에서부터 지면에 닿아 개발세발 아이처럼 쓰여진 글위에서 남실거린다. 이것이 뭐라고 울컥한거지? 평생 연필쥐고 살거라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내 삶에서 연필이 멀어져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연필은 사고의 이음이었고, 그 이음은 조각조각 이어진 조각보처럼 글이 되었다.연필이 멀어진 삶은 나의 모든 생각거리, 즉 사고함에서 멀어져 무의식의 기계적 삶의 영역으로 나를 몰아간다. 익숙지 않은 지금의 삶에 저항하던 처음의 몸부림도 이제는 잠잠해졌다 생각했는데 모처럼 느껴진 손맛의 두근거림은 강력한 저항으로 이어진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
샤프를 샀으니 예쁜 노트도 하나 사볼까. 거기다 책 한권 사서 읽으며 필사를 하고, 몽실 떠오른 생각거리를 적으면 좋을것 같다. 어느 시인의 시 한편 옮겨다 놓으면 더 좋을듯하고, 나중에 얼굴붉힐 조잡한 운율실린 마디글도 하나 적어보자. 고국은 한가위맞이로 분주한 지금 무엇하나 바쁠것 없는 타향살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으로 외로움을 달랠 수 있다면 차가워진 날씨에 마음까지 차가워지지는 않을듯하다. 그래, 오랜만에 서점도 가볼까? 알라딘보다 조금 비싸도 손끝으로 책등을 쓸어보고 빽빽히 박힌 책장에서 힘을 주어 책을 꺼내보고, 몇장 넘기다 다시 꼽아두는 잔망을 떨고, 또다른 책에 눈을 돌렸다가 호기롭게 책 한권 들고 계산대로 가야지. 높아진 하늘의 푸름은 어제 내린 비로 더 맑갛구나.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캄캄할 땐 당신 생각을 해도 되겠다.  (1) 2023.10.10
Beautiful New York  (0) 2023.08.15
올리브 나뭇잎 하나  (0) 2023.07.22
삶은 언제나 죽음보다 무겁고...  (0) 2023.06.29
공간의 쓸모 - Chelsea Market  (0) 2023.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