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공간의 쓸모 - Chelsea Market

huuka 2023. 6. 24. 12:08

건물 역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도시의 변화에 따라 생명이 덧입혀지는 것이 있는 반면 한 도시가 쇠퇴하게 되면 그곳에 자리한 건물까지 생명력을 잃어가게 된다. 어떤 글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데 무슨 책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리베카 솔닛의 책이었던 것 같은데 정확하지는 않다. 도시변동화에 따라 미국의 주요 도시에는 백인중심의 도심이 어느덧 외지인유입에 의해 변화를 갖게 되었다. 오래된 건물들은 조각들과 건물자체의 높은 예술성을 가졌지만 단기간 살다 이동하는 외지인들에 의해 관리가 되지 않아 그 생명과 가치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글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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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금요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책 한 권을 챙겨 지하철을 탔다. 날씨 탓일까? 도서관을 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렇게 동한 마음은 낯선 거리를 걷게 하고, 새로운 길 위에 자신을 세워두게 된다. 발길이 멈춘 곳은 14st역 부근의 첼시마켓( Chelsea Market.)이다. 첼시 마켓이 있는 건물은 본래 '오레오 쿠키'로 잘 알려진 미국 나비스코의 과자 공장으로 1890년대에 지어졌는데, 1958년 교외로 공장을 옮기면서 버려졌다가 1990년대 로컬 마켓으로 탈바꿈했다. 첼시 마켓 건물에는 과자 공장으로 운영할 당시 사용했던 골조와 엘리베이터, 녹슨 파이프 등이 건축 요소로서 그대로 남아 있어 건축물이 겪어온 시간과 이곳만의 독특한 감성을 느낄 수 있었다.

버려진 건물이 새로운 생명력을 얻었을뿐 아니라 도시전체를 살리는 상품이 된 것이다. 건물에 입점된 상점들은 밝은 불빛에 쌓여있지만 건물자체는 마치 동굴 같은 느낌이 든다. 어둡고 짙은 색깔의 바닥은 마치 기름때에 찌든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이곳만의 매력이 있다. 어떤 구조인지 알 수 없으나 복도의 천정은 높지만 막상 입점된 상점 안으로 들어가면 낮은 천정과 조밀한 구조에 묘한 기분마저 든다고 해야 할까.. 늘어선 각양의 음식점과 옷가게들 사이 서점이 입점되어 있다는 것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관광지로 명성이 높아진 만큼 이곳을 기념할만한 물건은 물론 뉴욕 로고가 찍힌 물건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었다. 특히 첼시는  부두가 가까워  선박 운송에 유리해 특히 소시지, 햄 등 미트 패킹 산업이 활발했던 공장 지대였다고 한다. 첼시 마켓의 로고가 소 그림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도 모르겠다. 첼시 마켓은 미국 국립 유적지로도 등록돼 있다는 것은 더 놀라운 사실. 

쓸모를 다하고 사라지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지만 쓸모를 다하기도 전에 사장되거나 버려지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이곳 역시 한때는 버려진 곳이었고 갱단까지 출몰한 곳이었지만 새롭게 변모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필요한 시간과 노력들이 있었겠지만 지금의 당당한 모습은 새로운 쓸모 외에도 방문하는 이들에게 또 다른 의미를 느끼게 하겠지. 우리의 인생도 그렇다. 인생을 쓸모나 가치로만 따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의가 아닌 주변 여건에 의해 그 쓸모나 가치를 잃어버린다면 슬픈 일이다. 그런 인생들이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찾아간다면 얼마나 기쁠까. 낯선 길을 낯설지 않게 걸어가는 나를 본다. 무엇하나 나아진 것도 얻은 것도 없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는 것이다. 매일 새로운 걸음을 걸으며 두려움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두려움 속에 나는 걸어간다. 이렇게 걷다 보면 내가 걷는 걸음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소망하는 일이 이루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많은 맛집을 뒤로 하고 서점에서 편지첩을 샀다. 편지봉투와 편지지가 하나로 이루어진 옛날 항공우편 같은 형태인데 총 52개의 테마로 만들어 놓은 거다. 누구에게 쓰게 될까? 나의 마음을 담으면 가 닿을까... 알길 없다. 그럼에도 이미 가 닿은 마음처럼 두근거리는 기대감을 갖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수기편지가 가진 매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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