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더욱 짙어진.

huuka 2023. 5. 27. 00:15

쉬고싶은 몸을 일으켜 도서관을 찾았다. 그 누군가는 내가 살아있는 것이 요행이다라고 말할만큼 몸을 돌보지 못한 시간이 길었다. 자신에게 냉혹하다는 것과 애쓰며 살아가야한다는 것을 몸이 보내는 사인으로 절감한다. 영양제와 마그네슘을 복용하기 시작했고 체중이 줄었음에도 몸은 여전히 무겁기만 하다. 마음의 짓누름이 큰 까닭일까? 부채처럼 짊어진 삶의 흔적때문인지 알 길 없지만 하루를 형벌처럼 어깨에 두르고 걸음을 뗀다.
도서관 열기를 기다려 아침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공원에 앉아 커피한잔을 마신다. 일주일에 한권 수혈받듯 책을 읽기위해 펼친다. 오늘의 책은 스벤 슈틸리히의 "존재의 박물관"이다.
.
기대감으로 책을 사고 막상 읽어내지 못하는 책이 있다. 나는 글에 생명이 있다고 믿는다. 그런 까닭에 책을 선택하는 것이 나 자신이라고 믿지만 때론 책이 나를  찾아오지 않으면 읽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읽고 싶지만 읽어 낼 수 없는 글. 무엇 때문인지 걸림이 되어 내용에 집중하기보다 자신의 생각속에 골몰하게 될 때 읽어도 읽은 것이 아니게 된다. 글쓴이와의 교감, 글쓴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그의 시선으로 사물을 보고 그 위에 나의 생각을 얹어 나가는 행위가 독서다. 특히 나는 단어하나. 표현하나에 발이 묶이기도 하는데 이 책이 그랬다. 구입하고 서문을 읽고서는 책을 덮었다. 한 문장. 망할 그 한 문장에 발목 잡혀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거다. 오늘 아침 쏟아지는 햇살속에 나는 다시금 그 문장을 읽었다. 여전히 망설이는 내 마음을 다독여 한 chapter 를 읽고 시간을 확인한다. 곧 개장시간이다. 여전히 그 문장에 속이 아린다.

" 벽에는 생겨난 지 얼마 안 되는 십자가 모양의 노란색 얼룩이 있다. 그것은 예전에 걸려 있던 십자가, 아무 힘도 없고 작은 십자가보다 더욱 또렷하고 선명하다" 나는 당시 이 대목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어떤 것은 더는 세상에 있지 않아서 그 존재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빈자리는 밝게 빛나서 어쩔 수 없이 눈을 끔뻑이며 늘 다시금 살펴봐야 한다. p19

더는 세상에 있지 않아서 더욱 또렷하고 선명한 흔적. 나의 흔적은 흔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나의 삶은 그 흔적과 별개의 것이 되지 못한다. 꼬리표처럼 붙은 그 흔적들이 내 삶의 곳곳에 출몰해 존재를 드러내고 나의 삶을 어지럽힌다. 지우고 싶은 흔적과 지워질까 두려운 그 흔적들속에 방황하는 자신을 본다. 지우고 싶은 것도, 지워질까 두려운 것도 유한한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삶은 인식의 문제가 아니다. 안다고 살아지는 것이 아니기에 충격을 받고 노심초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개장시간을 기다려 입장한 도서관은 한산하다. 나는 이곳에서 얼마간 책을 읽을 것이고 진전없는 영어공부를 하며 나의 흔적을 남기겠지. 지금의 이 흔적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대나무
.
그리움이 멈춘 곳에 마디가 생겼다.
그래서 나는
살아온 날맡큼의 마디를 새겼다.
.
소슬바람이 부는 날이면
마디는 그리움을 원료삼아
노래부른다.
.
장조가 아닌 단조로
자진모리가 아닌 진양조장단으로
오래 묵혀진 그 단단한 덩어리가
어찌 그리 아무렇지 않게
툭툭 뱉어지는 것인가.
.
휘어지되 꺾이지 않음이
잊힐듯 잊혀지지 않음이
움트고도 감추인 땅속시간만큼
뿌리처럼 깊이 박혔다.
.
그리움은 당신 것이건만
마디는 내몸을 이뤄
흔적은 내 안에 남는다. 2023.05.26.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간의 쓸모 - Chelsea Market  (0) 2023.06.24
기억이 박제되는 곳.  (0) 2023.06.03
까닭.  (0) 2023.05.08
연초록빛 너머를 볼 수 있을까.  (0) 2023.04.22
클로버(St. Patrick's Day)  (0) 2023.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