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기러기.

huuka 2022. 11. 5. 01:25

T의 일을 알게 된 건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닫아두었던 SNS를 열어 그간의 일들을 시간순으로 재배열해본다. 다시금 찬찬히 살펴보아도 이제는 더 이상 그들의 게토(ghetto)에는 발 디딜 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굳이 나중심의 세상은 아니었다할지라도 그들과 함께 어깨를 견주고 나란히 할 수 있었던 시공(時空)에서 나만 지워진거다. 아니 철저히 나만 거세당한듯한 느낌이 든다. 그럴 수는 없다는 생각과 T와 짝을 맞춘 H만큼은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울컥 눈물이 쏟아졌지만 어쩔수 없다. 자신이 속할 수 없는 리그를 바라보는 것은 잔혹하다. 어쩜 나도 그러했을지도 모르는 시간에 생각이 미치자 두려운 마음이 든다. 얼마나 많은 잣대와 공의로 재단하고,교만한 검열로 틈을 찾는 이들에게 아픔과 슬픔을 안겨주었을까. - 어쩌면 L이 느꼈을 절망이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마음이 아린다. 혼자라는 것보다 혼자 이 시간을 걷게 한 죄책감에 한없이 마음이 아려온다.-

출국 전 사모으기 시작한 아니 에르노의 책 한권을 들고 Fort Totten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햇살은 따스한데 바람이 차다. 아니 마음이 얼어붙었는지도 모른다. 스며드는 한기(寒氣)에 겉옷에 달린 모자를 덮어썼다. 책읽기에 집중할 수 없는 것은 추위때문인지 흩어진 마음때문인지 알 길이 없다. 한 없이 꼬리를 무는 생각과 자책. 영광이 되지못한 고난. 절망속의 자학. 그 순간 주위를 환기시키는 "끼루룩" 기러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고개들어 마주한 하늘에는 흐트러진 V자 대형의 기러기떼가 날아간다. 연이어 조밀(稠密)한 끼루룩거림은 채근(採根)하는 것만 같다. 이는 기러기 대형의 흐트러짐 때문인지, 가라앉는 나의 마음을 깨우기 위함인지.... 제법 소란한 소리를 내며 기러기들은 차례로 물살을 가르며 뭍으로 내려 앉았다. 어쩜 이렇게 의식을 가지고 기러기 울음을 들었던 적은 처음인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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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불렀던 가곡중에 기러기 울음이 들어간 곡이 있었던 듯하다.무엇이었을까? 자동재생되는 기억. 기억의 저편에서 꺼집에 낸 한 소절. 기억이 가물거리기는 하지만 제법 입에 남아 있어, 웅얼거리다 검색을 해보니 박목월의 시다. 이 시에 곡조를 붙여 3절로 이루어져 있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 아아- 아아 -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 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밤에 /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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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기러기 울음소리에 이렇듯 끝나버린 사랑과 외로움. 구슬픈 마음을 실어보낸다. 하지만 해 저물녘이 아닌 아침에 듣는 기러기의 울음은 그렇게 슬프지 않았다. 마치 지친 동료들을 독려하고 흐트러진 마음을 추스러겠금 채근하는 울음. 그럼에도 지극히 책임감이 묻어나고 엄격하지만 자애로운 아버지의 목소리 같은.

가을은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기러기 가족은 뭍가에 앉아 지친 날개를 쉬어간다. 이렇게 단란한 그들이 짝을 잃게 된다면 다가올 겨울이 얼마나 춥고 외로울까.무리를 지키는 펼친 날개의 기러기의 뒷모습이 단단하고 믿음직스레 보인다. 칼바람을 가르며 겨울을 보낼 따듯한 곳으로 날아오를 기러기 가족을 축복한다. 지금처럼 단란하게, 흐트러지지말고 함께 이 추운 겨울을 이겨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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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t Totten의 두번째 계절이다. 남북전쟁으로부터 1,2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남아있는 곳이라고 보기 어려울만큼 Fort Totten은 아름답기만 하다. 아름다움속에 감추인 슬픔과 아픔, 그래서 더 눈이 시릴만큼 눈부신 Fort Totten의 가을. 나는 지금 내게 닥쳐오는 소외와 단절 외로움을 통해 L이 겪었을 그 시간들을 되새김질 한다. 사람을 괴물이 되게 만드는 건 이해받지 못하는 절망에서 기인하는지도 모른다. 난 시간을 거슬러 그 시간의 L에게 손을 내민다. 내가 용서받기 위해. 그리고 지금의 나를 일으켜세우기 위해, 무엇보다 나 자신을 괴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아니 나의 남은 삶이 절망의 먹잇감이 되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
나는 오늘의 나를 조문(弔問)하고 셀폰 뒤 내일을 향해 웃음 짓는다. 싸늘부는 바람에 콧끝이 빨개져도 가을은 자기의 시간에 맞춰 알맞게 익어가고 있다. 나는 사랑하는 메리올리버의 "기러기"를 펼쳐 읽고, 시인의 눈으로 회귀(回歸)한 시간속의 너와 나에게 이렇게 전한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 세상은 너의 상상에 맡겨져 있지 / 저 기러기들처럼 거칠고 흥겨운 소리로 너에게 소리치지 / 세상만물이 이룬 가족 안에 네가 있음을 / 거듭거듭 알려주지. " 혼자가 아니라고, 여기에 네 자리가 있다고, 언제든 돌아와도 좋다고, 힘있게 날아오르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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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 메리 올리버

착하지 않아도 돼.
참회하며 드넓은 사막을
무릎으로 건너지 않아도 돼.
그저 너의 몸이라는 여린 동물이
사랑하는 골 사랑하게 하면 돼.
너의 절망을 말해봐, 그럼 나의 절망도 말해주지.
그러는 사이에도 세상은 돌아가지.
그러는 사이에도 태양과 투명한 조약돌 같은 비가
풍경을 가로질러 지나가지.
초원들과 울창한 나무들
산들과 강들 위로
그러는 동안에도 기러기들은 맑고 푸른 하늘을 높이 날아
다시 집으로 향하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세상은 너의 상상에 맡겨져 있지.
저 기러기들처럼 거칠로 흥겨운 소리로 너에게 소리치지 -
세상 만물이 이룬 가족 안에 네가 있음을
거듭거듭 알려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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