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잦아 가을이 짧게 느껴지는 것일까? 서둘러 색을 갈아입더니 이제는 후두룩 빗소리가 지나가면 바람따라 낙엽이 뒹군다. 이곳에 온 뒤론 날자를 잊어버렸다. 처음엔 시차에 적응되지 않아 어제 오늘 내일에 혼돈이 왔다. 그러다.. 내게 새로운 하루가 열려 그 하루가 저무는 것이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 까닭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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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 목사님 한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민 교회의 어려움 중 하나는 교인들이 떠나온 시절의 한국정서로 정체되어 있어서 새로운 무엇인가를 해 가기가 어렵다.'는 것이다.즉 70-80년대에 떠나온 사람들은 해를 거듭해도 그분들의 정서와 사고방식은 떠나온 때에 머물러 그것들에 대한 깊은 향수속에 살아가기에, 교회에서만이라도 그것들을 향유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모여서 나누는 이야기의 대부분의 소재또한 그 시절의 정치와 먹거리, 문화라는 것. 이민 1.5세와 2세들은 한국교회에 더 이상 모이지 않고, 미국교회라도 다니면 감사할뿐, 이민한국교회의 쇠락함은 covid이후 정점을 찍어 2023년이면 천교회이상 문을 닫는다고 한다. 떠나온 직후라면 모를까 이미 삶의 터전이 바뀌고, 30년이상 되신 이민자들의 지독한 모국사랑?을 난 이해하기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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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부터 내린 비가 아침까지 이어져 희뿌연하늘과 습하고 찬 공기가 온몸에 스며든다. 무슨 변괴인지 알수없지만 갑자기 입술을 달싹이게 한 노래가 있었다.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 세상에 이 가을에 봄비라니... 뇌회로를 멈추고 자신을 들여다보며 "가을비 우산속에"도 아니고 봄비?? 아무리 비가 온다지만 말이다. 누구 노래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깊이 각인된 그 무엇처럼 무의식가운데 노래가 불려졌다. 가사를 외우고 있다 생각지도 않았지만 술술 자동리플레이 되듯 노래가 불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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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 나는요 비가 오면 추억 속에 잠겨요.
그댄 바람소리 무척 좋아하나요? 나는요 바람 불면 바람 속을 걸어요.
외로운 내 가슴에 나 몰래 다가와 사랑 심어놓고 떠나간 그 사람을 나는요 정말 미워하지 않아요.
그댄 낙엽지면 무슨 생각하나요? 나는요 둘이 걷던 솔밭길 홀로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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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을 해보니 1984년 배따라기 노래다. 꽤나 조숙했던 나는 그 시절 이런 노래를 좋아했구나. 피식 웃음이 난다. 유튭으로 배따라기목소리를 다시금 듣는다.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들리는 가사를 한절한절 곱씹으니 눈물이 난다. 독백으로 이루어진 가사와 단순한 멜로디가 주는 안정감에서 이미 이별이 훅 지나가, 그 이별이 돌일킬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되어버린 어쩔수 없음의 안타까움이 잠시 잠깐의 호흡에 묻어난다. 난 갑자기 그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건지를.. 얼마의 시간이 지나야 아무렇지 않은 것이 아닌 것을, 아무렇지 않게 주억거리며 노래할 수 있는지. 헛된 미련도 미움과 원망도 다 사라지고, 언제즘 노랫말처럼 추억속을 걸을 수 있는 근력이 생길 수 있는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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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아픔을 느낀 시인과 달리, 잎새에 이는 바람을 좋아하는 나는, 바람불면 바람속을 걷는다는 가사가 살뜰히 다가온다. 언젠가 홍티마을을 간 적이 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가 빈집이 가득했던 고개위 골목마을. 그 옛날 무지개고개가 있어 홍치(虹峙),무지개마을에서 홍티마을이라 명명된 부산의 작은 포구. 난 그곳에서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나무가 노래하던 바람소리를 들었다. 더 세밀히 들으려 손을 귀에 모았다. 손가락사이로 바람의 소리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손을 함지박처럼 둥그스레 모아 귓가에 가져갔다. 바람과 노닐던 나는 바람소리에 맞춰 웃었고 그 곳의 빈집중 하나가 우리 것이 되길 소망했다. 지금보다 조금 젊은 내가 간절히 그립다.
오해도 한순간이지만 이해도 한순간이다.
어쩜 나는 불현듯 떠오른 노래 한곡으로 이해하지 못한 이민한국교회교인들의 한 모습을 이해하게 되는 첫발을 디디게 된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눅눅한 정오가 지나간다. 게으른 몸을 일으켜 바람속을 걸어보아야겠다. 추억에 잠겨 바람속을 걸으면 멍울진 마음이 조금은 풀어지고 아픈 나를 조금은 보듬어 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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