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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찬란해서 슬픈.

몇일 흐린 뒤 나온 햇살인 까닭일까? 그 빛의 강함은 모든 잎맥들을 통과하고 꽃송이들을 벙글어지게 한다. 초록의 싱그러움과 꽃들의 찬란함이 설웁게 나가온다. 저들은 어쩌자고 이다지도 푸르고 생명력 넘친단말인가? 앙상한 배롱나무에 허리를 두르고 피어난 붉은 꽃들이 그의 빈한 몸을 가려준다. 그렇다면 나의 빈함은 무엇이 가려줄까? 유달산 조각공원을 걸어서 가보았다. 꼬박 3시간30분. 미친듯이 걸어보았네. 무슨 힘으로 그렇게 걸었는지 알 길이 없다. 한번은 이 미친듯이 아름다운 봄날에 함께 미쳐보고 싶었던 까닭이었는지도 모르지. 퉁퉁 부어버린 발을 집에와 한참을 뜨거운 물에 담궜다. 배롱나무 허리의 붉은 철쭉이 내 발에 옮겨와 꽃물을 드린 듯 붉다. 뫼비우스의 띠안의 개미처럼 경계를 넘어서지 않고 다시금 제..

일상 2022.04.22

체취는 손끝에 머문다.

계절이 지난 옷을 정리했다. 박스에 넣어 보낼 것들을 넣으면서 문득 익숙한 체취에 머물렀다. 남아있는 체취는 코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손끝에 머문다. 그 순간 사위는 고요속에 잠기고 고도의 집중력은 한 곳을 향한다. 모든 기억들이 음률을 타듯 몸을 감싸고 그 시간 그 장소로 옮겨 놓지만 마음은 흔들린다. 하지만 얼룩 그대로 접어 박스에 넣고 뚜껑을 덮었다. 그렇게 박제된 기억에 흔적이 남았다. 피빛이 되어버린 그리움이 아닌 싱그런 초록의 삶을 살아내고 싶다. 생명력 가득한 삶을 살아내고 싶다. 이제는 손을 씻어야 하나보다.

일상 2022.04.16

시간을 거슬러

벚꽃이 피고 봄비가 나린다. 작년이나 올해나 계절은 계절에 맞게 시간을 흘러가고 있지만 나홀로 시간을 거슬러 가고 있지. 변하지 않은 것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변한 것도 없더라. 그 자리 벚꽃은 피고지고. 눈부신 윤슬과 흐르는 강물. 꽃자리마다 꽃은 자기 몫을 다하고 있더라구. 저기 저 자리에 당신이 서 있었고. 피사체를 쫓는 밀도높은 공기가 주위를 메워올때 즈음이면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해. 나도 저기 서서 초점을 맞춰야겠다고 말이야.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거야. 벚꽃은 질 것이고 청보리는 자라날거야. 그때즈음이면 우린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 더 좋은 사람이 되지 못했던걸 미안해하면서 아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겠지. 잔인한 4월이야. 내가 4월을 싫어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어버렸네. 많이도 돌아..

일상 2022.04.07

시간을 새기다.

가지마다 별모양의 개나리가 거리두기를 하고 핀 걸 보니 기어이 봄이 오고야 말았구나. 한 걸음씩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때 그 늦가을의 시간이 함께 따라온다. 가을을 지나고 겨울이 지나 봄꽃이 피었는데 말이지. 누군가는 지우는 것으로 잊고 누군가는 새기는 것으로 잊는다면 나는 후자에 속하는가보다. . 아리다. 이미 눈물샘조차 말라버렸는지 갈라진 마음이 더 아리다. 아프게 새겨진 그 시간과 그 장소. 지혜로운 자는 트라우마라 말했다. 아주 오랫동안 나와 함께 할 것이라는 예언과 더불어 건넨 처방전. 함께였을 때는 오히려 떠오르지 않았는데 혼자여서 속으로 곱씹어서 나를 망쳐버린 것일까? 비틀거리며 달리는 자동차. 좁은 차안을 울리던 소리. 흘리던 눈물과 앙다문 입술. 우울의 끝이 조현이라던가? 고장난 뇌조각..

일상 2022.03.29

봄이 왔다지요.

때로는 가슴속 말과 입술의 말을 달리해야 할 때가 있다. 입술의 말은 가슴 속 간절함을 알아달라는 절망을 달리면서도 자욱한 안개속에 사라져 간다. . 바람이 거세다 이 바람으로 안개는 물러가겠지만 내 마음속 그리움은 걷어가지를 못한다. 정확히 약기운이 떨어질무렵 만개한 목련마냥 내 가슴은 그리움에 부풀고 꽃망울이 터지듯 눈물샘이 터진다. . 살아서 무엇하나. 어디 한 곳 기댈 곳이 없다.

일상 2022.03.27

어제는....

나직나직 찬양을 읊조렸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그때 주님 하신 말씀 내 샘에 와 생수를 마셔라 오 주님 채우소서 나의 잔을 높이 듭니다. 하늘양식 내게 채워주소서. 넘치도록 채워주소서." 내 영혼의 갈함과 내 안의 빈 자리가 너무 커서 읊조리는 찬양이 크게 공명되어 내 마음에서 부서졌다. 소진한 내 육체만큼 내 영혼이 곤하다. . 벙글어지는 꽃을 시샘하는 추위가 산책을 나선 걸음마저 돌려놓는다. 내 마음은 어제를 헤매고 헛된 것을 구하던 입술은 그 샘에 나아가지 못하고 침묵중이다. 발걸음도, 입술도 여전히 어제다. 이제는 잔을 높이 들고 나아가야 할 주일이 다가오는데 꺾인 팔을 언제즈음이면 나는 곧게 올려 잔을 받들수 있을까.

일상 2022.03.19

그 섬에 섰다.

빨강의 정열과 파랑의 냉정이 합하여 만들어진 보라. 그 색이 발하는 분위기는 신비다. 그래서 그 옛날부터 보라는 아무나 사용할 수 없는 극 소수의 사람에게만 허락된 색인지도 모른다. 이곳을 혼자 오게 되리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2시간 가까이 섬과섬을 잇는 보라색다리를 걸었다. 초록의 바다위를 건너는 것인지 보라의 환상속에 내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 섬에 있었다. 무엇을 보려하고 무엇을 벗어버리려 그곳에 간 것일까?알수 없다. 그럼에도 괜찮다. 왜냐면 그곳은 모든 것이 신비로 감싸진 보라의 세계니까. . 뒷모습에 보이는 다정과 신뢰가 그들이 바라보는 곳을 함께 보게 한다. 그들의 길들임과 우리의 길들임을 생각해본다. 길들임도 사랑도 드라마틱한 단회적은 것으로 이루어낼 수 없다. 무던한..

일상 2022.03.18

보드랍지만 치명적인 비.

언제부터인지 계절이 바뀌기 전에는 꼭 비가 내렸다. 슬픔도 고독도 웃음도 희망도 같은 질량으로 내 몸에서 빠져나간다. 그렇게 또 한계절이 지나간다. 본성을 기억하는 깨어있음이 있다면 조금은 실수하고, 조금은 넘어져 있어도 괜찮다 자조했다. 그렇게 나의 봄은 더디기만 하다. . 어제는 아파트 동산에 올라 피어나기 시작한 꽃을 찍었다. 오늘에서야 사진을 보니 꽃들은 알고 있었다. 오늘 비가 오리라는 것을 말이다. 비가 오면 이내 저버릴 꽃잎에는 비장미를 찾아볼 수 없다. 알고 있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피어남으로, 하루를 살아감으로 그것으로 충분했다. 비가 오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딱히 비애감에 빠지지도 않았다. 황금수술을 드리워내고 꽃가루를 도략질하는 꿀벌에 그냥 그대로 몸을 내어주는 것으로 충분했다. 보..

일상 2022.03.14

강진 백운동별서정원 - 비밀의 정원.

위치 : 강진군 성전면 월하안운길 100-63 애기 손바닥 닮은 빨간 단풍이 보고 싶었다. 그걸 보지 못하면 제대로 된 가을이라 할 수 없지 않은가? 가을이 고르게 익어가고 있으니 이제는 그 얼굴을 보여줄 것도 갔다. 빨간 단풍을 만나기 위해 백운동별서정원으로 차를 몰았다. 이곳은 2번째 발걸음이다. 처음 발걸음을 했을 때 그 입구를 찾지 못했다. 넓은 차밭과 짙은 동백숲의 그늘은 쉬이 별서정원을 보여주지 않았다. 마치 신비에 쌓인 비밀의 정원처럼. 하지만 오늘은 기필코 그 비밀의 정원의 문을 열어보리라. 백운동 별서정원은 17세기 강진의 처사였던 이담로가 조성했다. 그가 말년에 자신의 둘째 손자와 함께 백운동에 들어온 이후 12대째 이어져 왔다. 하지만 백운동 별서정원은 다산 정약원을 떼놓고 이야기 할..

일상 2021.11.01

강진 - 설록다원 / 차향에 가을이 기울고 그리움도 기운다.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1216-13 설록 다원 월출산. 巖叢屹屹知幾尋 우뚝 솟은 바위산은 몇 길인지 알 수 없고 上有高臺接天際 위에 있는 높은 누대 하늘 끝에 닿았도가 斗酌星河煮夜茶 북두로 은하수 길어 한밤에 차 끓이니 茶煙冷鎖月中挂 차 연기 싸늘하게 달 속 계수나무 감싸네. 차밭이라고 하면 보성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차의 역사를 안다면 강진 월출산 자락에 위치한 설록다원을 떠오려야 할 것 같다. 우리나라 녹차의 대중화를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아모레퍼스픽에서 운영하는 설록다원 밭이다. 가을 하늘이 높아진 어느 날 강진으로 향했다. 목적지가 차밭이었던 것은 아니다.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을 찾기 위함이었지만 진입로가 공사 중으로 지나쳐 우연히 발걸음이 머물게 되었다. 도로 양편으로 펼쳐..

일상 2021.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