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

잊혀짐의 시간

huuka 2017. 10. 15. 13:31

<일상 이야기 >  잊혀짐의 시간

가정예배 2017.10.15. 총리가 된 요셉

본문 창세기 41:1-57

.

.

오늘 가정예배는 창세기 41장 총리가 된 요셉의 이야기로 드렸다. 그이는 오늘 예배를 통해 술관원장에게 잊치고 만 2년을 보낸 요셉의 시간과 풍년과 흉년의 꿈이 흉몽인가 길몽인가를 대비하여 아이들과 나누고자 했다. 나눔 과정에서 나는 잊혀짐의 시간에 관하여 가슴 먹먹함이 있었다

.

잊혀짐의 시간은 고통이다

.

잊혀짐의 시간이 왜 고통일까? 그 잊혀짐의 시간은 오롯이 자신을 마주 하고 서야하기 때문에 고통인 것이다. 원망의 시간도. 절망의 시간도, 불평의 시간도,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나면 남는 것은 자신이다. 맨몸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대면해야 하는 것이다. 그때 자신은 무엇을 바라 볼 것인가? 여전히 안으로 안으로만 향해 자신을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눈을 들어 자신에게서 시선을 옮겨와 하나님을 바라볼 것인가?

.

.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요셉은 잊혀짐의 시간을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이뤄가는 기다림의 시간으로 바꾼 것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자신에게 보여준 그 꿈을 기억하였고, 형들에게 팔리움을 당할 때나. 보디발의 집에서나. 감옥에서나, 자신에게 행하신 신실하신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복 주심'을 기억하였다. 요셉에게 남겨진 것은 사람들에게 잊혀짐의 기억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억하심,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요셉은 감옥에서의 삶 역시 성실할 수 있었다.잊혀짐의 절망기다림의 희망으로 바꾼 것이다.

.

.

지금 끝나지 않을 터널과도 같은 시간을 지나가고 있다

터널은 반드시 끝난다. 하지만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때 나의 심장은 터질것만 같고 숨 막힘을 호소하듯, 지금의 시간은 답답하기만 하다. 늘 아이들의 왁작지껄함 속에 있던 주일의 소란스러움과 대비된 오늘의 적막함은 자꾸만 나를 가라앉게 하고 잊혀짐의 외로움을 느끼게 한다

고통이다

하지만 이 고통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다. 이 적막함에 "익숙해짐"이다. “잊혀짐에 익숙해짐이다. 1차 대전 당시 살아남은 사람의 고백 중에 이런 고백이 있었다. “가장 나쁜 것은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악에 익숙해진다는 거예요. 그 기간이 그렇게 길어질 줄 알았다면 우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도 몰라요 시간이 갈수록 우리는 점점 더 무감감해지고 그저 살아남으려고 본능적으로 움직였지요.” 

.

기억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 잊혀짐과 외로움에 내가 익숙해지기를 원치 않으신다.  요셉이 절망의 시간에 익숙해지지 않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 약속을 기억하였듯이 나에게도 기억하기를 원하신다. 무엇을? 오늘까지 나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일과 앞으로 이루어가실 일을 기억하기를 원하신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고요한 중에 주께 부르짖으며 날마다의 성실로 나아갔듯 이 잊혀짐과 적막함속에서 좀더 세밀히 자신을 살피고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닐까?

.

사람들에게 잊혀짐이 은혜다.

하나님을 기억함이 은혜다.

잊혀짐의 시간을 하나님을 기다리는 시간으로 치환하는 자는 더 큰 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