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

걷기 속 인문학 / 샘솟는 기쁨 / 황용필

huuka 2017. 10. 22. 23:58

<독서와 일상이야기> 2017.10.22.

걷기 속 인문학 / 샘솟는 기쁨 /  황용필


"길은 이처럼 내가 선 곳이 새로운 시작점일 때 아름답게 빛난다."p124


지는 해를 바라보기 위해 시간을 맞추어 걸음을 옮겼던 적이 있다. 

석양을 사랑했던 아버지. 그 석양을 보기 위해서 나는 40분을 걸어 가파른 언덕을 올랐고 붉게 타오른 하늘을 바라보면서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밤별들이 듬성듬성 얼굴을 디밀 때 나는 반대편을 돌아 걷고 또 걸었다. 나는 그 길위에서 길을 잃었다.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오로지 나 혼자였다. 모진 이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한단 말인가......3시간 족히 걸린 그 걸음걸음에 나는 나의 아픔을 묻었다. 그리고 그 아픔을 밟고 다시금 걸었다. 그 길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내 눈 앞에는 새로운 길이 나 있었고 눈길이 닿을 수 있는 그 끝점에 아주 작은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길은 나만의 "산티아고 순례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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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그이랑 동네마실로 제법 먼 곳을 다녀왔다. 집에서 35km떨어진 부산 홍티마을이었다. 번잡한 공단뒤에 자리잡은 자연마을이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가 폐가가 대부분이었던 곳이지만 그곳에서 바람과 세밀히 보아야 보이는 작은 담쟁이들과 고양이, 새들의 지저귐들을 만났다. 작디작은 마을 무엇 볼 게 있었을까만은 우리는 한시간을 넘게 마을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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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을 때 감각을 느끼며 걸으라고. 발바닥으로 느껴지는 지면의 울퉁불퉁한 높낮이, 온몸으로 전해지는 바람결이나 가까이에서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비가 개인 후 어디를 향하는지 위험스럽게 움직이는 달팽이나 지렁이의 꿈틀거림도 찬찬히 헤아리며 걷는 것이다.골몰하고 염려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 집중적으로 관리하고 걷는 시간에는 즐기는 것이 지혜다."p115 

 


바람소리가 들린다. 더 잘 듣기 위해 손을 귓가에 모았다. 길은 가만히 내가 더 세밀히 바람소리에 집중할 수 있도록 기다려줬다. 땅끝에서부터 불어온 바람은 길위를 스치고 풀들을 차례차례 쉴수 있도록 눕혀주고는 하늘로 올라갔다. 욥의 귓가에 속삭임으로 다가온 그분의 음성이 나에게도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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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아 나는 여전히 기대한단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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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웠다. 가슴에서 떼어낸 종양들도 나의 삶의 일부였던지 떼내고 나니 아팠다. 내 삶이 위로받길 원했다. 애쓰고 달려온 걸음이 헛것인냥 서러웠다. 그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에레츠교회"도 걱정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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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분은 내 몸을 감싸 안은 바람을, 내 눈을 행복하게 해준 작은 풀꽃들을. 내 귀를 간지럽힌 새들의 지저귐을 길 위에 숨겨두셨다. 마치 소풍나온 아이에게 허락한 보물찾기처럼. 하나하나 찾아 움켜쥔 바람. 풀꽃, 지저귐은 그분의 위로와 격려로 내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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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의 손을 맞잡고 좁은 골목길을 돌아 내려올 때 비로소 나는 웃을 수 있었다. 그분이 길이 되어 주셨으니 우리와 같이 작고 연약한 자들의 손을 잡고 걸어가야지. 걷다 힘들면 이렇게 멈춰서서 다시금 손을 귀에 모으고 바람에 깃든 그분의 음성을 들으면 되는거잖아. 서두를 필요없어.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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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 걷기 속 인문학 책을 펼쳤다. 황용필. 분명히 목사님인데 걷기마니아. 칼럼니스트라고 적혀있다. 독특한 책이다. 칼럼니스트인 까닭일까? 문장력이 뛰어나다. 또한 다방면에 걸쳐 박식하다. 어설프게 글적는 사람 기죽이는 글쟁이다. 근데 나는 왜 처음 듣는 이름일까? 내가 무식한 까닭이겠지.걷는 것에 관한 유익을 읽는 이들로 하여금 함께 걸어보게끔 동기를 부여하는 좋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걷는 행위를 묵상으로 이끌어가는 저자의 생각은 탁월하다.

'참다운 나'를 발견하는 것이 종교의 원초적 책무라면 묵상은 자기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해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나를 보는 것이며 나로부터 빠져나와 다른 내가 나를 관조하는 영적활동이다. 그것이 산책, 걷기와 뿌리가 같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걷기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우리에게 자유와 창의성 그리고 카리스마를 선물하는 또 하나의 은혜의 활동이다. 그러므로 걷는다는 것은 길위의 묵상이다. 대략 두 갈래에서 안팎으로 작용하는 영성 활동이기도 하다. 내면으로 파고들라치면 성찰이고 밖으로 표현하면 공감이며 성찰은 자기마음 안을 반성하고 살피는 것이다......이에 반해 공감은 밖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감정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이다. p78

이 책의 또다른 특징은 인문학이다. 하나하나의 제목안에 소개되는 인문학들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산문집 "달리기를 말 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나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묵상", 다비드 르 브르통 "느리게 걷는 즐거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이외에도 많은 작품들을 마치 길을 걷다 발견한 작은 풀꽃이 주는 기쁨처럼 누리게 된다. 저자는 최고의 길은 먼데있는 길도 아니고 가보지 못한 곳도 아니라 늘 가던 그곳이라고 말하면서 어떤 데냐보다 그곳에 무엇을 담느냐가 명소(p181)라고 말한다. 좁은 골목길을 걸으며 나무들이 몸부딪혀 소리내는 바람속에서 나는 그분의 음성을 담고 왔으니 오늘 내가 그이랑 걸었던 홍티마을은 나만의 명소로 기억될 것임에 틀림없다.

걷기란 혼자만의 몸짓이고 사색이자 묵상이지만, 저 앞으로 다가오는 사람과의 무언의 몸짓 언어이기도 하다. 하늘의 구름과 공기 흔들거리는 나뭇잎 그리고 눈앞에 아른거리는 자연의 미물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움이란 온전한 집중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걷기란 비움과 온전함 그리고 공유다. 고음과 저음으로 번잡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내면의 소리와 자연의 향연과 대화하면서 발을 옮기는 작업이다.p193

 

아직도 걷기를 망설이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이 책을 마주하게 된다면 길을 걸음으로 누리게 되는 풍성함을 맛보게 될 것이다. 나는 걷는 것이 좋다. 그이의 따슨 손을 잡고 걷는 길은 더 없이 행복하다. 걷는 걸음마다 추억으로 남겨주는 그이의 애정은 더 없는 감사제목이다.


자연주의 영성을 가진분들께 일독을 권합니다.
걷기를 주저하시는 분들께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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