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시간이 기르는 밭

huuka 2022. 12. 11. 04:46

"쥐도 새도 모르게 말이야. 잡아가서는 소금창고에 가둬놓고 죽도록 일만 시킨다고 해."
서해안 염전의 이야기는 언제나 공포에 가까웠다.비교적 최근이라 할 수 있는 2014년 염전노예기사는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으니 말이다. 그런 염전을 나는 몇 차례 찾았던 적이 있다. 신혼여행으로 가게 된 엘도라도 리조트가 전남 신안에 있었던 까닭이다. 그날은 6월임에도 바람이 몹시 불었고, 그 휑함이 주는 적막함은 늦봄의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뭐랄까? 염전이 주는 그 무위의 고독이 좋았다. 그 후 3-4번 더 염전을 찾았던 것 같다. 그것도 대한민국 최고의 소금 생산지라 일컫는 태평염전을 말이다.  염전에 얇게 깔린 바닷물은 반사경이 되어 하늘을 그대로 옮겨다놓았다. 무엇이 하늘이고 무엇이 염전인지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교교한 바닷물이 시간을 들여 조금씩조금씩 고형화되어 간다.

급기야 손목을 쓸 수 없을정도가 되어 손목보조기를 달고 한 주를 보냈다. 딸애가 보내온 책을 읽고, 주일 강의 준비를 하면서 가능한 손을 쓰지 않으려 애쓰니 여간 불편한게 아니었다. 하지만 손목을 움직이지 않도록 한 것만으로도 손의 통증은 한결 나았다. 여전히 아침에는 바늘하나 들어가지 않을만큼 손가락이 퉁퉁 붓기는 하지만 하루하루 붓기도 조금 나아져 가는 것 같아 다행이다. 김훈의 책을 꺼내들었다. <자전거 여행1> - 자전거 여행.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문학동네 - 의 맨 마지막이 서해안의 염전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시간이 기르는 밭"p249.
.
김훈의 글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그의 표현이 조금 넘친다고 할까? 개인취향이겠지만. 염전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역시. 그 속의 고됨과 척박함은 찾아볼 길 없이 한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한편의 글을 적기 위해 다방면에 걸쳐 연구하고 조사한 그의 박식함은 과히 경탄할만하다. 또한 정확한 단어로 적확한 자리에 배치하는 글솜씨또한 얄미울만큼 뛰어나다. 아마도 그의 글을 좋아하는 이들의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나는 오늘 그의 글을 읽고 내가 바라본 염전을 떠올리고, 그의 글이 얼마나 나의 시선을 풍성하게 하는지 깨닫는다. 언젠가 내가 바라보았던 염전에 관하여 글을 쓴다면 과연 어떤 글이 나올까? 김훈의 글과는 사뭇 다를듯하다. 매일 매일 반복되는 노역과 나의 몸과는 상관없이 노동이 노동을 밀어가는 하루하루. 그 짠내나는 노동의 현장을 조금은 경험하고 있으니 말이다.손목이 아파 필사가 힘드니 이곳에 옮겨적는 것으로 그의 글을 다시금 읽고 기억해야겠다.
.
자전거 여행 1. / 김 훈 / 문학동네  / p249-255
시간이 기르는 밭 - 아직도 남아 있는 서해안의 염전
염전은 폭양에 바래지며 해풍에 쓸리운다. 염전의 생산방식은 기다림과 졸여짐이다. 염전은 하늘과 태양과 바람과 바다에 모든 생산의 바탕을 내맡긴 채 광활하고 아득하다. 염전은 속수무책의 평야인 것이다. .... 염전은 기다리는 들이다. 온 들판에 펼쳐놓은 바닷물이 마르고 졸여져서 그 원소의 응어리만으로 고요해질 때까지 염부는 속수무책으로 기다린다.... 염부는 생명을 기르지 않지만 시간이 염전의 생산을 길러준다....
염부는 기다림의 구조 안으로 물을 끌어와서 펼쳐놓고, 그 기다림을 바닥을 훑어서 시간의 앙금을 거둔다.폭양 아래서 염전 바닥을 훑는 염주들의 노동은 모든 일차 산업의 생산노동들 중에서 가장 단순한 원초성의 풍경을 이룬다....염주는 다만 고무래로 밀고 곰배로 긁고 삽으로 퍼담는다. 염전노동의 이 단순성은 인간의 노동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저절로 빚어지는 결정체이기 때문일 터인데 이 노동의 단순성은 소금의 원초성과 닮아 있다. 염부의 노동은 시간을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전개되고, 소금은 먹이의 재료를 시간의 안쪽으로 끌고 들어가서 거기에 시간의 맛과 무늬를 새겨넣는다....
염전은 생산의 가장 순결한 밑바닥이고 소금은 모든 맛의 발생과 작동의 기초이다. .....
소금 창고는 지상의 모든 건축물 중에서 가장 헐겁고 남루해 보인다. 소금창고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서 군집을 이루지 않는다. 소금창고들은 시선의 방향으로 소멸하는 개별성이다.소금창고는 공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의도를 드러내지 않는다.....
소금창고는 이 위태로운 사실성의 경계 위에서 햇볕과 바람과 풍화되는데 검은 콜타르를 칠한 목재들은 색이 바래어지고 목질이 뒤틀리면서 풍화되는 것들의 속 살결을 드러낸다. 소금창고는 역학구조를 이루는 선과 면을 공간 속에 녹여서 사실성을 증발시키는 방식으로 풍화된다. 바닷물은 풍화되어 새롭게 태어나는 소금의 사실성을 이루고 소금창고는 위태롭게 풍화되면서 사실성의 멍에를 벗는다. 염전은 시간을 기르는 밭인데, 그 풍화의 끝은 신생이거나 소멸이다.....
햇볕이 증발시킨 물기를 바람이 걷어가면서 소금은 엉긴다. 소금은 시간을 건너오는 바다의 배후처럼 염전 바닥으로 온다. 바람은 습기를 걷어가되 물을 흔들지는 말아야 한다......남서풍에 실려오는 소금은 말라서 바스락거린다. 이 소금은 바다 전체를 한톨의 결정체 안에 응축하는 향기에 도달하고 모든 맛에 스미고 모든 맛을 다스리는 삼투력과 통솔력을 갖는다. 염전은 인공구조물이지만 이제 천연기념물의 펴정으로 서신면 바닷가에서 말라가고 졸여진다.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처럼 비가 내리면.  (0) 2022.12.17
3줄21단어72자  (0) 2022.12.12
고양이 식당.(食堂ねこ)  (0) 2022.12.09
바다 끝.  (0) 2022.12.06
집이 그립다.  (0) 2022.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