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와 이토의 달팽이 식당을 읽다. 2008년 첫 발행되어 2010년 영화화되었다. 그리고 올해 리뉴얼판이 나왔다. 초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리저리 이사다니다 없어지고 2018년 선물로 받았다. 오가와 이토의 글쓰기가 나는 좋다. 어깨에 힘주지 않고 그냥 나직나직 풀어내는 이야기가. 근사한 배경이나 특별한 사건이 등장하는 것이 아닌 그냥 그렇게 일상이 소재가 되어 우리 이웃의 이야기를 전하는 문체가 좋다. 소박하면서도 따뜻함이 깃든 오가와의 작품들은 동화적 상상력을 잃어버리지말라고 말해오는 것만 같아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되는 느낌이랄까? 딸애의 소포박스에 리뉴얼판이 들어있다. 다시금 읽게 되는 달팽이 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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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책을 3번 읽기란 드문 일이다. 뭐랄까? 세계적인 명작이라거나 전문적인 지식을 전하는 것도 아닌 이상은 더더욱. 그럼에도 나는 풀이 죽어 있거나 삶의 변곡점을 지날 때 오가와 이토의 책이 손에 있었던 것 같다. 3번을 읽게 되니 이제는 내용보다 오가와의 특별한 표현법이랄까? 그녀의 단어 하나하나가 어떻게 토해지고 적혀졌는지 조금은 알 듯하다. 그녀의 츠바키 문구점도 애정하는 작품중 하나이지만 달팽이 식당에 마음에 더 머무르는 까닭은 글에 소개되는 오감을 자극하는 음식에 관한 표현 때문인지도 모른다. 추억의 가장 나중지점에 속해 있는 것이 음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추억속에 남겨진 음식은 단순한 대뇌의 기억이 아닌 오감. 즉 온몸이 반응하는 기억인 까닭이다.
2018년 달팽이 식당의 내지(內紙)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대에게 행복을 주는 작가네요. 그대는 어떤 책을 쓸지 기대됩니다. <고양이 식당 huuka kim> 2018.1.31"
그 기대대로 <고양이 식당>을 쓰지는 못했지만 나는 분명 오가와 이토의 영향을 받았다. 올해 초 출간한 "그럼에도 눈부신 계절"에서 나는 추억의 가장 저편에 있는 음식들을 끄집어 내었다.김치국밥이 그러했고, 매실장아찌며 우동이 그러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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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밥을 삼키듯 고통의 나날이 지속되던 때가 있었다. 고양이 2마리를 데리고 낯선 땅에 온 것은 미치지 않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첫발을 디디고서 깨달았다. 괜찮다는 것이 괜찮은 것이 아니라는 것도. 너무 쉽게 믿었다는 것도.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온 몸으로 절감할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늦어버린 뒤라는 것도.... 그럼에도 두 마리의 고양이를 지켜내는 것이 두고 온 두 딸을 지키는 것과 같은 사명으로 느껴진 것도 분명 정상은 아니었으리라. 곤한 하루가 부벼오는 보드라운 털에서 동그란 눈을 뜨고 바라보는 그 순진무구에서 그르릉 거리며 안정감을 더해주는 울림에서 충분히 위로와 격려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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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작은 쥐 한 마리가 나왔다. 2층인데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오래된 건물이니 라디에이터구멍을 타고 올라온 것인지 창문 에어컨 구멍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다. 더욱이 고양이 2마리가 있는데 생쥐라니... 하기야 우리 고양이는 쥐를 보면 오히려 더 놀라 털을 세우고 호달달 떨 것이 분명하지만... 라디에이터 밑 고양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끈끈이를 설치하고 이밤을 보내야하는데 걱정이다. 생쥐가 잡혀도 치울 일이 걱정이고, 잡히지 않으면 더더욱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우습다. 쥐 한 마리 잡지 못하는 고양이라니, 내 마음을 알 길 없는 어리숙한 고양이 두 마리를 바라보며 언젠가 나만의 <고양이 식당>을 적어야겠다는 기대가 꿈틀거린다. 돌아보면 소중하지 않은 시간이 없다. 아프고 힘들고, 때로는 죽을만큼 괴로웠던 시간도 지나보면 살아진 시간만큼 죽음이 갖지 못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이 갖지 못하는 삶의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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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죽음을 생각하지만 더 자주 삶을 생각한다. 아직은 지켜야 할 것과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바늘하나 들어가지 않을만큼 퉁퉁 부은 손가락 마디를 문질러가면서라도 살아내어야 할 분명한 것이 있다. <고양이 식당>도 적어야 하고 기록되어야 할 이야기가 내게는 남아 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어떠한 삶이든 생은 죽음보다 아름다우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