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서재를 떠나보내며.

huuka 2022. 7. 4. 22:58

책장의 책들을 박스에 옮기니 80여 개가 된다. 미처 정리하지 못해 박스째 베란다에 둔 것과 합하면 90박스가 넘을 듯하다. 통장에 잔고는 하나 없지만 이렇게 책 박스는 늘었다. 라이프 스타일? 지적 허영심? 모르겠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구입하고 간직했을까? 다 읽지 않았다 할지라도 아니 절반이라도 제대로 읽었다면 이런 삶의 모양일까? 다독이 중한 것이 아니라 천천히 사유하며 내 것으로 만드는 독서가 중하다 누군가 말했다. 그래 그 말이 옳다. 빠르게 읽고 빠르게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한 권을 읽고 낯설게 보고 틈을 가지고 생각해보는 것. 기필코 몸으로 읽어내고야 마는 체독이 중하다 생각하는데 나는 얼마나 실천하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단지 활자중독이었는지, 다만 책을 사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것이 나의 삶의 현장이고 내 삶의 역사다. 이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이것들과 작별한다. 내 삶의 크나큰 한 부분을 잃어버림이고 떠나보냄이다.

3년인가? 목포에 거의 3년을 살았다. 일가친척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무슨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이가 전라도 하분출신이라서 그것 하나만으로 이곳에 왔다. 경상도 여자가 낯선 전라도에서 참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마침 코로나라 관계 맺을 곳도 없이 그저 자연을 벗하고 다니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남도의 나지막한 산과 지평선과 맞닿는 밭, 4계절이 분명한 농촌의 모습은 내 삶을 윤택하게 했다. 사람이 주는 복이 아닌 창조주가 오롯이 자연에 남겨두신 일반은총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가슴 깊이 깨닫게 된 시간이다. 이곳도 이제 이별한다. 낯섦이 정겨움이 되고 한 곳 한 곳 다시금 되짚어 발걸음을 옮겼을 때 밀려오는 이 애잔한 애정은 무엇인지....

내 삶의 대부분을 보낸 경상도보다 더 가슴에 새겨질 모습들이다. 서재를 떠나보내며 이제 마음도 떠나보내야지. 그래야만 한다. 안으로만 열리는 시작이라는 문은 비워내야만 새롭게 채워지는  장소인것이다. 바람의 향기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굿바이 바람의 향기. 굿바이 風香.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각인.  (0) 2022.07.06
강하지는 않지만 강합니다.  (0) 2022.07.05
기차는 다니지 않습니다.  (0) 2022.06.29
아가. 비마중가자.  (0) 2022.06.28
초여름의 꿈 - 라벤더  (0) 2022.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