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

의식있는 삶의 피곤함. - 자연사박물관 / 이수경

huuka 2020. 8. 15. 11:10

아침부터 울음이 나를 찾아왔다. 이런 날은 어쩔수 없다. 속수무책으로 울음에 나를 맡기는 수 밖에.
울음의 발단은 택배기사님들의 '택배없는 날' 기사로부터다. 택배가 없는 날 하루 전 늦은 밤까지 그들에게 맡겨진 갑절의 일을 했다. 기사에 실린 사진에는 택배없는 하루전날 8개중 7개가 도착해 대문앞에 쌓여 있는 사진이었고 8개중 도착하지 않은 한개또한 재고부족에 의한 것이라는 기사내용이었다. 그냥 그렇게 울컥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차오르는 더위속에 시간을 맞추기 위해 달리고 계단을 오른 그들의 삶. 배달을 마치고 차에서 숨돌릴 사이도 없이 폰을 열어 알림을 보내야하는 초를 다투는 그들의 삶은 이미 사람이기를 포기했다. 열악한 "생존"에 내몰린 그들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고 우리의 남편이며 우리의 아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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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지를 찾지 못했던 남편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택배를 했다. 그것도 정직원이 되어 택배를 한 것이 아니라 물량이 많은 정직원의 하청을 받은 따지고보자면 하청의 하청이었던 형태다. 물건 한 개당 얼마씩 받는 것에서 2중으로 돈을 제하고 나머지를 받는 것으로 얼마나 많은 물량을 배달하느냐에 따라 돈이 되는 일이었지만, 그 일마저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 일이 없어 나가지 못하는 날들이 있었고. 아침일찍부터 물건을 싣기 위해 한 두시간은 차 안에서 대기하면서도 몇 개 되지 않는 물량을 할당받기도 했다. 밥 먹을 시간이 없다는 말에 도시락을 사주었지만 가져간 도시락마저 번번이 그대로 들고 왔다. 물병에 담긴 물조차 그대로여서 그렇게 땀을 흘리는데 물마저 안먹으면 어떻하려고 그러냐는 말에 화장실 갈 시간도 도로위에서 닫힌 건물안에서 화장실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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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이수경의 "자연사박물관"이란 책을 읽었다. 노동운동은 나에게 낯섬과 동시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어릴 적 제법 유복하게 자란 나는 그들의 지난한 삶을 모르고 자랐다. 봉제공장이며 일용직이며 오히려 어린 식모와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노동으로 나는 편한 삶을 살아온 "온실안 공주님"이었다. 나는 그만큼 세상에 대하여 둔했고 나는 그만큼 세상의 날섬과 세상의 척박함을 몰랐다. 부도후 세상으로 내몰린 나의 삶은 대학을 졸업했음에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무능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온 몸으로 부딪혀 하나하나 알아가는 세상은 온실 속에서 바라본 것과는 너무나 다른 것들이었다. 온실 속 삶은 그들에게는 비난거리였고 나에게는 수치였다. 이러한 등식때문인지 사회운동, 노동가는 나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것들로 자리잡았다.

이수경의 "자연사 박물관"은 학생 운동권 출신의 한 노동자와 그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대학 졸업 후 노동 현장에 투신한 운동권 학생의 후일담과 척박한 노동자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싸우는 노동운동가의 투쟁이 있다. 또 남편을 지지하면서도 가족의 안위와 생존을 걱정하며 막막한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노동자 아내의 불안이 담겨있다. 아내 역시 대학시절 민주화와 노동환경개선을 위해 함께 운동을 했던 사람으로 남편의 삶을 지지하며 응원하면서도 가정을 이끌고 살아가야 하는 엄마로서 아내로서 불안과 불열을 그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총 7편의 단편이 촘촘이 엮인 글로 치밀하고 세밀한 심리의 변화와 갈등, 세상을 향한 안타까움과 따뜻함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좋은 글이었는데 나에게 있어 다시금 "의식있는 삶"이란 무엇이며 이 세상에서 더불어 "함께 살아감"에 대하여 질문을 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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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등학교시절은 매케한 체류탄연기와 함께였다. 다녔던 고등학교가 대학과 인접한 곳인 까닭도 있었지만 그만큼 데모가 잦았다. 고등학생인 우리는 국어시간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본문으로 대입을 준비해 나갔고, 밖에서는 자연사박물관의 주인공들의 노동운동및 민주화운동이 한창이었다. 나에게 그들의 삶은 활자화된 지식으로 축적해야 할 그 무엇이었고 그들의 운동으로 인해 학교생활에 지장을 받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부도후 사회에서 온 몸으로 느끼게 된 불평등과 여자로서의 삶은 애쓰고 쟁취해야 할 그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무엇하나 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눈을 질끈 감고 살아내는 것 뿐이었다. 눈을 감지 않으면 이 하루를 살아갈 그 생존의 터전마저 잃어버릴 수 밖에 없는 제도의 폭력성앞에 나는 서 있었다. 40이 되어 신학을 하고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하면서 그것이 나아졌을까? 모르겠다. 나만 느낀 것인지 모르지만 결코 사회와 다르지 않음을 나는 느꼈다. "여전도사""부교역자"라는 절대적인 을의 입장에서 "사랑"과 "희생"으로 포장된 억압과 착취를 느꼈다. 나는 또한 번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의식있는 삶의 피곤함"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도 억압과 착취속에서도 기득권이라는 위치에서 누리는 그 하나마저 빼앗길까하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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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게 의식있는 삶은 눈물흘리는 행위 이것이 전부이고 나의 한계인듯하다.이것이 못난 자아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의 분열이다. 나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며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될까? 나이 50 이제는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닌 나의 자녀들을 위해 이 땅의 다음세대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는 때라는 것을 안다. 이전 세대들의 지난한 삶을 통해 그 녹을 먹고 편안을 누린 삶. 이제 조금은 빚청산을 위해 피곤할지라도 "의식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