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비오는 날의 금서(禁書) 그리고 학장교회

huuka 2020. 6. 30. 14:41

< 비오는 날의 금서(禁書) - 파도가 밀려와 달이 되는 곳 - 그리고 학장교회>

건강이 안 좋은 몸은 일상의 흐름이 조금만 뒤틀려도 여실히 드러난다. 토요일 두 건의 결혼식이 몸에 부대끼었는지 주일예배 후 적잖이 피곤을 느낀다. 주일 저녁 얼굴이 뵈지 않았던 선생님께 심방전화를 하며 들었던 말이 가슴에 콕 박혀서 입 밖으로 갖은 저주와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욕설을 퍼부어도 성에 차지 않아서 밤내 끙끙거리고 있었다. 후두두둑. 세찬 빗소리에 창문을 닫고 오도카니 앉았다. 성도의 고통을 가슴에 안고도 어쩌지 못하는 부교역자의 한계가 시스템 안에 갇힌 신앙임을, 계급 안에 갇혀버린 사역임을 여실히 드러낸다. 안타깝다. 아프다. 교회가 너무나 많이 썩어있다.

기침이 시작된 아침. 간이 건물로 지어진 사택이 요란한 빗소리에 진동한다. 커튼을 젖혀 창밖을 보니 심하게 나무가 너울거린다. 답답함에 창문을 열어보니 이내 빗방울이 안으로 들이친다. 답답해도 창문을 닫을 수밖에. 닥치는 대로 손에 잡히는 책을 펼쳤다. 윤정현 산문집 <파도가 밀려와 달이 되는 곳>이다. 휘리릭. 운명처럼 열린 부분을 읽어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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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0

섬 집마다 토방마루에서는 가까운 개펄이 눈앞에 보였다. 그런 집마다 많았던 동네 아이들이 동구 밖 사장나무 아래에서 놀다 지쳐, 바다에 나간 엄마를 기다렸을 것이다. 물때가 매번 달라서 아이들은 엄마가 돌아와 밥을 지을 시간을 잘 알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게 배고픔에 지친 아이들은 잠이 들었을 것이다. 섬마을 돌아다니는 동안 내내 불과 몇 십 년 전의 마을 풍경이 영화처럼 선명하게 떠올랐었는데 그런 삶의 흔적들이 지금 이 시각에도 하루가 다르게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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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집 아기>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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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글 한 자락에서 섬 집 아기 노래가 떠올랐다. 잘 써진 글은 평면이 아니라 입체감 있게 우리 마음에 새겨진다. 마음이 울컥하다. 마음이 저려서 눈물이 찔끔 난다. 물때를 알지 못하고 주린 배를 잡고 기약 없는 엄마를 기다리는 아기가 되어버린다. 엄마가 날 잊을 일도 없고, 엄마가 안 올 것도 아닌데 설웁다. 그냥 그렇게 서러운 시간이 어쩔 수 없는 삶 속에 있다. 견디며 시간을 지나가는 연습을 해야만 하는 삶 자체가 서럽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 사라져 가는 것들을 바라보는 애틋한 윤정현 선생의 마음까지 얹혀 내 마음은 속절없다. 비마져 내리니 우울이 나를 먹어버리게 내버려 둘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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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쳐 그 다음 글을 읽어나간다. 어깨가 쳐지고 눈물이 떨어져 나락으로 내닫는 나를 윤정현 선생은 천국으로 날아오르고 싶었던 첫 마음이라는 글로 인도한다. 강진 도암 학장교회이야기다. 남편을 부추긴다.
학장 교회로 가요.”
당신 몸도 안 좋고 이렇게 비 오는데 어떻게 갈라고?”
어젯밤 통화내용을 알고 있는 그이로서 나의 답답함을 그냥 둘 수도 없는 까닭에 쏟아지는 빗속에 시동을 걸고 강진 도암면으로 향한다. 집 앞 마트에 들러 혹 만나게 될지 모르는 목사님과 성도들을 위해 음료와 과자를 샀다. 목포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한치 앞도 분간 못할 만큼 무섭게 비가 쏟아진다. 억지를 부린 나조차 암담하고 괜시리 남편에게 미안해진다. 목숨을 걸 일이 이렇게 없단 말인가. 조용히 방구석에서 이불 덮고 잠이나 잘 걸 하는 마음이 들 정도다. 아내가 아프니 서리를 없앨 에어컨을 틀수도 없고, 온도를 높여서 서리를 제거하자니 시간이 든다. 남편의 손이 부산히 움직이니 조수석 내 마음조차 불안하다. 이럴 때는 두 눈 감고 잠든 척이 최고다. 얼마나 달렸을까? 빗소리가 조용해지고 시야가 열렸다. 초록이다. 몇 주 전 심은 모가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빗속에 보이는 초록이 이렇게 예쁠 수가 있을까? 초록이 주는 생명력은 내리는 빗줄기도 어쩌지 못하는가 보다.
모다
시골에 한 번 살아보지 않은 도시 여자의 입에서 모다하는 소리가 우스웠던 것일까?
아니 윷이다.”
?” 이 남자가 또 아재 개그를 하네, 하는 눈으로 쳐다보니 남편은 귀여워서란다.
어느새 차는 구불구불 고갯길을 맞았다. 고갯길을 내려가니 맞은 편 오르막에 세월을 고스란히 앉고 있는 옛 가옥이 눈에 들어온다. 시야를 돌려 오른편에 학장교회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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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장교회는 1907년 설립된 한국 기독교 초기교회다. 처음에 교회는 학장리 안태 마을에 있었지만 1937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다. 학장교회의 시작은 선창마을의 신자들로부터다. 옥천면에 있는 백호교회를 다녔던 그들은 교회를 가기 위해 두 시간 정도를 봉황리 샛 고개를 넘고 산길을 걸어 온천면에 있는 교회까지 가야했다. 2년이 넘도록 그렇게 했던 조병헌, 조만승, 조한승 신자들은 안태마을의 홍순섭의 작은방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안태교회가 되고, 후에 학장으로 이전하여 학장교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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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 유별한 시대에 지어진 교회로 출입구가 두 개다. 건물의 숨구멍을 열어두기 위해 토방마루를 낀 4칸 접집으로 지어진 교회는 사람만의 공간이 아닌 고양이까지 드나드는 교회가 되었다. 문을 열면 붙박이 신발장이 왼편에 있고 올라서기 쉽도록 넓직한 돌 디딤판이 보인다. 교회에 들어서면 세월의 색을 입은 붉은 기둥과 하얀 회칠이 주는 청초함과 따뜻함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최근에 들였는지 장의자가 좁은 예배당을 꽉 매우고 있는데, 넓은 창문 탓인지 좁은 공간임에도 답답함을 느낄 수가 없다. 그 흔한 전자키보드나 피아노조차 없다. 먼지 앉은 반주기처럼 보이는 것에는 세월을 가늠할 수 없는 테이프가 들어 있다. 많은 이들의 눈물의 기도가 쌓인 곳이라 그런지 자그마한 공간이 품고 있는 안정감과 깊은 영성의 결이 불안하고 우울한 내 마음을 감싼다. 한참을 앉아 작은 목소리로 기도한다. 상처 입은 성도를 위한 기도. 방향을 잃어버린 교회를 향한 기도. 작지만 신앙의 뿌리를 간직한 지켜져야 할 한국의 시골교회들을 위해 마음모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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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는 비속에 길 떠나게 한 윤정현 선생이 소개한 학장교회에 관한 글을 옮겨와 본다.
p132-3
근처 삼수골에서 켜왔다는 나무들엔 이 건물을 지었던 사람들의 마음과 바람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반가의 목재처럼 크지 않지만 아담하고 긴 목재들은 초창기 이 교회 사람들의 마음을 닮았다. 1900년 전후 최초의 신도들은 향촌 안태골에서 숯을 굽고 살았던 4가구 사람들이었다. 서럽고 시린 삶의 구원을 찾아 왕복 사십 리는 족히 되었을 길을 따라........
서까래들의 가지런한 줄 맞춤은 흡사 소녀 애들의 수줍은 옷 맵씨처럼 단아하고 예뻤고, 그 사이의 면들은 하얀 회칠로 마감했다. 나무들은 죽어 색의 나이를 먹었다. 짙은 먹갈색을 뛴 나뭇결들은 매끈한 니스칠로 반짝거렸지만 새촘하게 짙은 누나의 립스틱 같았다. 나무들의 생김새도 교회를 지었던 일손들의 단아함을 살갑게 보여준다. 돈이 많아 큰 목재를 깎아 각재로 쓸 수 없어서 거의 둥근 원형 그대로의 나무둥치를 가냘픈 처녀의 살결처럼 곱게 깎아 들보나 마루로 사용했는데 각자의 그 구부러진 형태를 잘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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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현선생의 글에 마음이 머무는 까닭은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상실과 허무가 담겨있지만 그것들을 바라보는 따뜻함이, 사물을 통한 사람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기에 읽는 이는 무언의 위로를 얻게 된다. 선생의 눈을 통해 나는 학장교회의 서까래를 바라보고, 서까래를 올리고 회칠을 하던 마음 고운 선한 동네사람들의 손을 보게 된다. 고난한 삶 속에서도 그들은 이 노동을 통하여 천국을 경험하였을 것이고 소박한 그들의 손이 초창기 한국교회의 역사를 남겼다. 나는 시공을 초월해 윤정현 선생과 더불어 그들을 만난다. 다시금 비가 치기 시작했다. 토담 구멍으로 사라진 고양이들이 궁금하다. 밖으로 나와 차에 있는 사료를 가져와 고양이들을 불러본다. 자연과 벗한 고양이들은 낯선 외지인에 대한 경계가 심하다. 좀체 사료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제법 떨어져 조용히 처마 밑에 앉아 고양이들을 기다린다. 한 녀석 고개를 삐죽 내밀어 나와 눈 한번 맞추고 사료를 먹기 시작한다. 그 모습에 다른 녀석들도 나와 사료를 먹는다. 고양이를 위해 몸을 낮추고 일체의 소리를 죽인다. 빗소리가 들린다. 이 고요를 이 평안을 고양이도 나도 사랑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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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한다고 해도 오가는 소리는 사택에 계신 목사님의 신경을 쓰이게 했나보다. 여목사님이 나오신다. 미리 준비해간 음료와 과자를 드리며 윤정현 선생의 글을 쫓아 오게된 사연을 말씀드린다. 목사님은 교회의 역사와 더불어 금산교회자형 전형적 남녀구분교회의 모습을 설명하시며 그 교회도 꼭 가보라 하신다. 비 오는 날 따뜻한 차 한 잔을 권하시는 목사님. 비 오는 날이라 그 권함을 마다하고 우리는 다시금 길 위에 섰다. 좋은 글은 길 떠나게 만들고 그 길 위에서 눈매 고운 사람을 만나게 한다. 그것이 위로다. 사람으로 상처 입은 마음은 사람으로 치료하게 한다. 희망이 없어 보이는 교회도 교회가 다시금 희망이다. 라는 마음을 갖게 한다. 그것이 회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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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한 일에 목숨 걸 필요가 있나? <파도가 밀려와 달이 되는 곳>을 비 오는 날의 금서로 지명한다. 길을 떠난다면 햇살 좋은 날 길을 떠나자. 그 길 끝에는 고운 눈매의 선한 마음이 있다. 그 만남의 축복을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