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1985년 사순절 기간에 헨리 나우웬이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의 세인트폴교회에서 여섯차례에 걸쳐 강연한 내용을 기초하여 엮은 것이다. 이 책의 부재가 <미혹과 불안의 시대, 예수를 어떻게 따를 것인라>로 적혀 있듯 이 시기의 나우웬은 앞길이 불명한 시기의 삶을 살고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세상이 소요하고 그 어느때보다 불안하다. 이 불안은 교회의 최대절기인 부활절로 접어드는 고난주간, 사순절마저도 망각의 늪으로 빠뜨린다. 교회력이나 교회절기가 개신교에 있어 뭐 대수냐만은 부활이 없는 신앙은 온전한 기독교가 아니다. 부활로 가는 사순절기간 특히 고난주간은 자신의 믿음의 모습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다시금 주님앞에 은혜를 간구하며 나아오는 시간이다. 그 시간 읽기에 적합한 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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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현대인들에게 다시금 경종을 울리는 한가지가 있다. 예수와 더불어 "지금여기"를 오롯이 살아내어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 가장 큰 유혹가운데 하나가 삶을 앞당겨 살라는 속삭임이라는 것이다. 오늘이 없는 내일은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오늘이라는 단 하루다. 내일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며 그분이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우리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둘러 미래를 살아내려고 발을 동동거리게 된다. 파랑새를 쫓아 오늘 주 앞에 행할 성실을 포기할 때 그것은 무의미하며 무용이다. 현재에 충실하면 미래는 자라나게 된다. 그런까닭에 성경은 곳곳에서 "인내"를 가르쳐준다. 인내는 단순히 참고 견뎌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여 현재의 의미를 온전히 경험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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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평생을 살고 반환점을 돌아 종착점이 어디인지 가름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렇게 확신을 가졌던 믿음마저 불확실해지고 자신 만만하던 인생조차 답없음을 깨닫게 된다. 코로나팬더믹현상속에서 인간의 나약함과 부재하신 하나님의 존재감을 이처럼 확고히 느낀적도 없다. 그래서 오늘도 이 하루를 산다. 이 하루의 성실,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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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초대 – 와서 보라. 나의 길을 떠나 예수의 길에 들어서다
chapter 2. 부름 – 나를 따르라. 익숙한 두려움에서 일어나 믿음의 한 걸음을 내딛다.
chapter 3. 도전 –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충만히 사랑받고 자유로이 사랑하게 되다.
chapter 4. 대가 – 너희 십자가를 지라. 답 없는 내 실상을 예수 십자가에 잇대다.ㅋ
chapter 5. 보상 –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으리라. 마음이 시린 날에도 생명의 하나님을 누리다.
chapter 6. 약속 –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와 지금여기를 오롯이 살아내다.
우리를 부르시는 이 음성을 듣고 따르면 대개 삶에 질서가 잡힌다. 여기저기 찢겨져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삶에 하나의 구심점이 생긴다. .... 초점이 없는 인간은 공허하다. 따를 대상이 없는 인생은 정말 그렇다. 그러나 “나를 따르라”라고 부르시는 사랑의 음성을 만나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p15
성육신의 핵심은 집이다. 우리가 곧 하나님의 집이며 이 집에 그분과 함께 살도록 초대 되었다는 것이다. 알고 보면 바로 여기의 나. 이 얼굴과 손과 마음을 지닌 내 몸이 곧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다. ... 영적 삶이란 우리가 하나님 가족의 일부가 되어 살아간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행한다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행한다는 뜻이다.p26-27
하나님이 계신 곳이란 곧 ‘그분 자신이 누리는 친밀한 삶’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이루시는 사랑의 가족이다. 그곳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p28
듣고 묻고 거하라. 그러면 점차 예수님 안에서 자라 갈 것이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라고 부르시면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진다. 그분을 따르는 삶은 의미부터가 다르다. ‘나를 떠나 하나님’을 향하라는 부름이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을 우리 존재의 중심에 모시라는 부름이다. 기꺼이 ‘나’를 내려놓고 점차 ‘주님, 제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라고 아뢰는 것이다. 이는 자아를 찾는 길이 아니라 자아를 비우고 버려 전혀 새로운 하나님의 존재 양식에 내 중심을 내어 드리는 길이다. 예수님은 평생 자신을 점점 더 버리심으로 전적으로 하나님을 중심에 두셨다. 예수님은 ‘나’라는 세상을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신다.p37
하나님 나라는 모든 것이 전복되는 곳이다.
예수님은 언제나 인간의 논리를 정면으로 돌파하신다. 그분은 실재 전체를 하나님 나라 쪽으로 이끄는 데 관심이 있으실 뿐이다. 제자들은 더는 세상의 논리에 잡혀 있지 않고 하나님의 비논리 속으로 들어간다. 모든 논리를 벗어나 전혀 새로운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마침내 이를 깨달은 베드로의 반응은 “주님 제가 틀렸습니다. 주님은 고리를 잡는 법도 아십니다.”가 아니었다. 그가 예수님께 고백한 말은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였다.p46
두려움은 우리 삶의 곳곳을 침범해 결핍을 느끼게 만든다. 결핍감에 얽매여 살다 보면 어느새 내가 쌓아 둔 것을 빼앗으려는 적이 생긴다.p49
우리가 지위와 재물에 연연함은 바로 두려움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은 두려움을 이긴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두려움을 내려놓으라는 뜻이다. p52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첫걸음은 ‘경청’이다. 그 다음은 ‘내 것’을 등지는 걸음이다. 기도와 묵상을 통해 그 생명의 자리를 바라보길 바란다. 영적 삶을 가꾸려거든 우리의 생각 속에서 주님이 떠나시지 않게 해야 한다. 그분을 바라보아야 한다. 영적 삶은 무언가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선은 그분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의 두려움을 버리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에 이끌리는 일이 먼저다. p 57-58
예수님을 따른 삶이란 헛되이 헤매거나 주저앉아만 있는 삶으로부터 우리를 불러내시는 주님의 음성을 따르는 삶이다. ...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란 ‘나’를 버리고 ‘타자’이신 그분께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따르면 인격의 가장 깊은 곳인 우리의 마음이 그분께로 다가간다. 주님을 따르는 삶은 내 내밀한 자아와 깊이 관계되는 일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영과 빛과 마음 안에 살되 또한 나의 영과 빛과 마음으로 산다는 뜻이다. 수동적 모방자가 아니라 각자의 고유한 소명과 부름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발견한다는 뜻이다.p60
예수님을 따르려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새로워지는 일, 곧 회심이 필요하다.
욕구는 우리가 과거에 받았던 상처에서 비롯된다. 외로움과 자신에 대한 회의와 내면의 고뇌가 너무 커지면 자칫 사랑을 강요할 수 있다. 인정 욕구에 찌든 세상에서 사람들은 그 욕구 때문에 서로를 물고 뜯으며 상처를 낸다.p71
상처란 정확히 무엇인가? 거부당하는 경험이다. 충분히 사랑받지 못하는 경험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음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영적인 삶 전체는 그 처음 사랑에 접속되는 삶이다. 처음 사랑의 근원에 가닿는 순간부터 우리는 욕구와 상처라는 사슬의 속박에서 서서히 해방된다.p73
우리가 기도함은 자신이 온전히 사랑받는 존재임을 머리로만 아니라 존재의 중심과 마음으로 알기 위해서다. 그래서 기도한다. 기도하면 이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욕구에 찌들거나 남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을 수 있다. 사랑을 베풀되 보담을 바라지 않을 수 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자유로워진다.p75.
예수를 따르는 삶이란 욕구와 상처에 찌든 사랑으로 남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근원적 사랑으로 서로 사랑한다는 뜻이다.p76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음은 내 심연의 자아가 처음 사랑을 만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도 없고 한계도 없다. 우리는 관계를 맺을 때 상대방도 그 처음 사랑으로 사랑받는 존재임을 인식해야 한다. p78
그리스도인의 삶,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의 관건은 서로를 향한 사랑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지금 여기에 눈에 보이게 할 수 있음을 깨닫는 데 있다. 신앙의 핵심은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원수에게 내주던 지배권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이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다. 미움과 배척과 질투와 원한의 감정은 우리가 만들어 낸 두려움의 감옥에 우리를 가둔다.p86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그 사람을 사랑하심을 안다. 원수를 향한 사랑은 작지만 구체적인 행동으로 시작되며 그 근거는 감정이 아니라 확실한 지식이다. p88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란 우리가 걷는다는 뜻이다. 사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그분의 길을 걷는다는 뜻이다. 이 어둡과 깨어진 고통의 세상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길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우리를 속속들이 아시는 그분과 동반자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p91
하나님이 몸소 당하지 않으신 고난이란 없다 외로움이든 분노든 고통이든 배척이든 예외가 없다. 그래서 우리의 분노와 고통과 씨름은 다 하나님 안에 있으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들려 올라갔다. 우리 모두를 부활하신 주님의 몸 안에 모으셨다. p99
모든 인간의 고난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십자가다. 이는 우리가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고난을 보도록 부름 받았다는 뜻이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고난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는 전시장이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볼 때 역사란 하나님의 처절하고도 광범위한 고난이 전개되는 과정이다. 단 그분의 부활도 함께 전개된다. 모든 고난의 한복판에 끊임없이 돋아나는 희망의 징후가 보이기 때문이다.p101
예수님은 우리의 짐과 십자가와 고뇌를 없애 주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짐과 고난과 고통을 그분의 짐과 고난과 고통에 연결하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위대한 초대가 있으니 곧 상한 몸으로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과 연대하여 살라는 부름이다. 긍휼이란 주님만 우리와 함께 고난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분과 함께 고난당하도록 초대받았다는 뜻이다. p104
당신의 염려를 기도로 전환하라. 당신의 두려움을 하나님의 두려움과 연결하라. 당신의 우울을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보라. 그분이 모든 고난을 살아내셨으니 그분 앞으로 가져가라.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임재 안에서 고통과 기쁨과 슬픔과 즐거움을 초원하여 살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기도하면 당신의 삶이 하나님의 삶과 연결된다.p111
순종이란 온몸으로 듣는다는 것이다. 내면 깊이 그분과 소통하며 살라는 말씀이다.p134.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은 영적차원이다. 그저 감정이나 육체적 상태가 아니라 영적 선물이다.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은 지극히 어려운 상황 속에도 건재하다. 영적 삶에는 기쁨이 슬픔과 행복과 고통과 쾌락을 모두 아우른다. 기쁨은 더 깊고 온전하고 풍성하며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p136
경축은 좋은 순간만 경축한다는 듯이 아니다. 희열의 기쁨은 삶 전체를 끌어안으며 고통스러운 순간과 이별과 심지어 죽음도 피하지 않는다. 죽음을 경축함은 죽음이 바람직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를 최종 지배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죽음은 힘이 없다. 고통을 경축함은 고통이 선해서가 아니라 그 문제를 통해 기도하며 함께 우리가 떡을 떨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괴로움의 순간도 하나님께 올려 드릴 수 있다. 우리는 ㄱ마사로 하나님께 그 문제를 올려 드린다. 경축은 감사의 표현이다.p143
하나님은 자신을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셨다. “여호와”를 직역하면 ‘나는 너희와 함께 하는 자’라는 뜻이다. 곧 ‘나는 너희의 여행에 함께하는 하나님, 너희의 곁에 머무는 하나님. 너희에게 충실한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 복음의 가장 큰 기쁜 소식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싸우시고 우리와 함께 길을 걸으시며 우리의 고통을 겪으시고 우리의 죽음까지도 함께 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계시하신 대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되 놀라울 정도로 친밀한 방식으로 우리 안에 거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이 내 안에 한 몸처럼 사신다고 고백할 수 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구약에서 우리 여정에 동행하셨고 신약에서 성육신하여 우리와 함께 고난당하셨으며 이제 우리 숨결 속에 계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호흡한다. 하나님은 바로 이 긴밀성을 택하여 우리 숨결이 되셨다. ‘영’의 헬라어인 ‘프뉴마’는 숨결을 뜻한다.p158.
우리 삶의 가장 큰 유혹 가운데 하나는 삶을 앞당겨 살라는 속삭임이다. 그리스도인 앞에 놓인 도전은 의미 있는 일이 늘 지금 바로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믿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현재에 충실하면 미래는 자라나게 되어 있다. “인내”란 현재의 자리에 온전히 머물며 순간에 충실하고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이 이곳에 있음을 믿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삶을 앞당겨 사느라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진리를 맛보지 못한다. 인내란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여 현재의 의미를 온전히 경험한다는 뜻이다.p163
우리는 온전히 현재에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늘 지금 여기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영적 삶의 비결은 현재의 자리에서 성령의 숨결에 주목하면서 그분이 불어 넣으실 새 생명을 믿는 것이다. p165.
기도란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행위다. 기도는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여 우라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경청하는 길이다. 기도는 여기에 있으면서 경청하는 훈련이다. 섬김이란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를 행하는 것이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지금 여기 우리 안에 계심을 알면 알수록 다른 이들에 대한 주의력도 깊어진다. 자아에 덜 함몰되어 자신에 대한 염려가 줄기 때문이다. 자기 일로 염려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더 또렷이 보인다. 섬김의 결과를 얻어 내려는 행위나 세상을 구원하려는 초조한 욕구가 아니다. 우리는 변화가 보장된다는 조건 때문에 섬기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랬다가는 자칫 극단으로 흐를 수 있다. p169-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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