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전도서 / 더글러스 숀 오도넬 / 부흥과 개혁사

huuka 2020. 3. 24. 11:42

전도서 / 더글러스 숀 오도넬 / 부흥과 개혁사.
- 에덴의 동쪽, 그 즐거움 -

 

1. 전도서의 목적

전도서는 하나님의 지혜 문학으로 메세지에 통일성이 있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사 다시 오실 그리스도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헛되도다. (헤벨 / 38) 일시적, 덧없는, 무의미한, 어리석은, 무익한, 단명한, 불확실한, 부조리한, 터무니없는, 공허한, 바람을 잡음, 거품, 대기 속으로 사라지는, 연기, 안개, 호흡, .
지혜 / 지혜로운(53), 하나님(40), 수고(33), 주다/주었다.(16), 죽음(21), (33), 기뻐하다.(17)

솔로몬은 가장 헛된 것에 대한 우울하고 냉엄한 메시지, 즉 모든 것을 전적으로 무익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어떤 수고를 하여도 특별한 의미나 영구적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 ➤ ➤ ➤ ➤ 두려워 떠는 믿음

핵심적 질문 :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아무런 유익이 없다.”
                  ❷궁극적으로 무일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이 덧없는 해 아래에서 어떻게 삶을 살아갈 것인가?
                     “헛된 자존감모든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2. 전도서의 내용

* 전도서 14-8절에서 솔로문은 이 땅의 순환성에 비해 또한 그것의 영속성과 달리 우리의 활동은 독창성이 없고 반복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히에로니무스는 정말 헛되고 덧없는 것은 인간을 위해 지음을 받은 땅은 영원한데 정작 땅을 다스려야 할 인간은 순식간에 흙으로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 우리의 수고는 새로운 것이 없고 기억될 것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일은 옌 지금이나 새로우며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우리의 수고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또한 그를 통해 능력을 받음으로써 헛되지 않을 것이다. 즉 해 아래의 삶은 일시적이고 비관적이지만 아들을 통한 삶은 영원하고 즐겁다는 것이다.
* 전도서 3장에서 하늘의 관점에서 세상 시간의 똑딱임을 보는 목적은 무엇보다도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 아름다움을 깨닫기 위함이다.
* 우리에게 주어진 계시로 만족하자. 우리의 시대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깨닫자. 모든 것을 때에 따라 아름답게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이자.
*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햇빛 아래에서 거룩하고 행복해야 한다.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라. 그리스도의 계명에 순종하라.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
* 때의 목적 : 첫째로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 아름다움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주권적 햇빛 아래에서 거룩하고 행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영원하고 완전하며 공의로운 섭리로 인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 왜 죽음에 사로잡힌 문화가 죽음에 대한 진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진지하게 이야기하지 않으려 하는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악을 보는 일은 때가 되면 공의로 심판하실 하나님을 향해 믿음과 소망을 갖고 돌아서도록, “질그릇 같이 연약한 인생인 우리를 돕는다.
* 전도서 4장에서의 교제의 유익은 첫째로 둘은 하나보다 일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둘째로 그들은 필요할 때 서로 도울 수 있다. 셋째로 그들은 서로에게 정서적 도움을 줄 수 있다. 넷째로 그들은 서로를 보호해 줄 수 있다.
* 전도서 5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세 가지 진리를 배운다. 첫째로 하나님께는 집이 있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예배하는지 아시며 심판하신다. 셋째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이방 신들과 달리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듣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지녀야 할 영원한 태도는 겸손과 경외와 존경과 신뢰이어야 한다. 우리는 이 선하신 왕 앞에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 아우구스티누스 기도할 때 피해야 할 것은 많은 기도가 아니라 많은 말이다.”
마틴 루터 기도는 짧고 빈번하며 강력해야 한다.”라고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이런 끝없는 잡담이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 전도서 5장에서 문제 삼는 것은 서원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서원한 것을 더디게 또는 갚지 아니하는 행위다. 자신이 말한 것에 대한 구체적 방안이나 그것을 지킬 생각이 없는 추동적 약속이 어리석다는 것이다. 그것은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
* 전도서 7장의 죽음은 근면 절제, 사랑, 관용, 존경, 및 겸손의 위대한 멘토다. 죽음은 가장 심오한 질문을 던지게 하지만, 그 교훈에 귀를 닫고 자는 자들은 무자비하게 비웃는다.
* 두려워서 떠는 믿음은 타락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로운 방법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두려움 가운데 신뢰하는 믿음은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지혜로운 길이다.
* 우리가 사는 세상이 굽은 세상임을 발견한다. “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바르게 (upright)지으셨으나 사람이 내려가는(downward)길을 찾은 것이라.”
* 전도서 8한계 안에서 한계에 이르도록 살기.” 미로 속에서 길을 찾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한도 내에서 하나님의 관점이 필요하다. 직관에 반하는 첫 번째 태도는 권위에 대한 복종이다. 이런 복종은 명령에 대한 순종. 충성, 기본적 예의와 신중함을 통해 나타난다. 우리는 권세에 복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즐거움을 누림으로써 한계 안에서 한계에 이르도록 살아야 한다.
* 전도서 8장과 9장은 알지 못함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을 가르쳐준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측량할 수 없다. 우리의 평생이 헛되다. 도덕성은 필멸성에 맞서지 못한다. 율법을 지킨다고 아담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다. 전도자에게 죽음은 자연현상이 아니라 불가항력적 악이다. 죽음은 확실하고 비통하며 갑작스럽다.
* 전도서 10장은 말에 대한 경고다. 플라톤은 지혜자는 할 말을 하는 자이나 바보는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자다.” 셰익스피어의 말을 빌면 우매자는 소음과 분노만 가득하며 아무런 의미도 전달하지 못한다.” 루터는 지혜자는 몇 마디 말로 가르치고 자신의 느낌을 간략하게 제시한다. 반면에 어리석은 자는 말이 많고 절제하거나 참지 못하며 한마디에 대해 수천 마디로 대답한다.”
* 전도서 11 - 12.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킴으로써 창조주를 기억해야 한다. 네 가지 명령에 주목하라. “네 떡을 물 위에 던지라, 나눠 줄지어다, 씨를 뿌리고, 손을 놓지 말라.”
지혜로운 사람은 많은 질문에 대해 누가 알겠느냐?”라고 말하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일하는 법을 배운다. 일을 하라는 명령과 무지에 대한 진술을 결합하면 너의 무지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일하라.’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신비한 일은 하나님의 소관에 맡기고 우리는 우리의 일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적 부지런함은 단순히 자기 개발을 위한 근면이 아니다. 우리의 일은 다른 사람의 유익에 맞추어져야 한다.
* 전도서 12장 암브로시우스 그러므로 물 흐르듯이 설교하라. 분명하고 명쾌하게 설교하라. 그리하여 적절한 논박으로 청중의 귀에 달콤함을 붓고 말씀의 은혜로 회중을 설득하여 당신이 인도하는 곳으로 그들이 기꺼이 따르게 하라.” 참된 지혜의 말씀은 충분하며 하나님이 주신 진리는 우리를 찌르고 우리를 견고하게 한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건 더 많은 연구를 위한 더 많은 책이 아니라 이미 계시된 것에 대한 더 많은 순종이다. 영감으로 기록된 충분한 말씀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위함이다.
* “일의 결국은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인간의 자율성은 여기까지다. 솔로문은 우리가 창조함을 받은 근본 이유는 창조주와의 관계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런 관계를 통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섬기며 그의 모든 명령에 겸손히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대답이다. 이것이 일의 결국이다.
* 경외와 순종은 구속적이다. 우리 마음에 있는 하나님은 급하고 만만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소비자 기독교 신앙과 잘못된 영성을 바로잡는다. 경외와 순종은 정확히 하나님이 우리가 묵상하고 주의하기 원하시는 바로 그 용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그분의 해법이다. 그것만이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성경지혜문학의 핵심 개념이다. 이는 여호와에 대한 복종 존경 신뢰 예배로서 곧 내가 앞서 요약한 두려워 떠는 믿음이라는 개념을 가진다.
*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그의 계시에 대한 순종은 진정한 신앙을 형성하는 분리될 수 없는 두 요소다. 이런 이유로 일부 학자들은 경외와 순종이라는 단어를 교차적으로 사용하기도 하며 어떤 학자들은 더 나아가 솔로몬이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복음의 가장 심오한 진수를 내다봤다. 전도서의 결론 부분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하는 자들에게 종말론적 소망을 가져다준다.

3. 전도서의 결론

낙심에서 믿음으로 : 불신앙적 삶으로 인한 공허함과 낙심의 궁극적인 치료제는 하나님이다. 여호와만이 인생의 허전함과 공허함을 채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