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바울을 읽다 - 로완 윌리엄스의 바울 서신 읽기 / 로완 윌리엄스 / 비아

huuka 2020. 3. 17. 20:02

바울을 읽다. - 로완 윌리엄스의 바울 서신 읽기 / 로완 윌리엄스 / 비아.

감히 바울을 읽다.


신학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바울을 꿈꾼다.
바울의 신앙, 바울의 선교, 바울의 교리 그 풍성한 가지 한 자락만이라도 붙들고 나무에 올라볼 생각을 하지만 아무리 작고 약해보이는 가지일지라도 몸통의 깊이와 넓이의 접합점에서 두 손들고 포기해버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 역시 바울을 좋아했다. 그래서 로마서를 얼마나 읽고 읽었던가? 어디 로마서 뿐이랴 바울의 매력적인 서신서들을 연구해보려 모은 책이며 자료들은 또 얼마였던가? 그럼에도 여전히 바울은 내게 어려운 사람이었고, 감히 넘볼 수 없는 놓은 산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비아에서 바울을 읽다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적어도 바울에 관한 책이라면 벽돌정도 높이의 책 일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160페이지 정도의 얇은 책이다. 활자는 또 얼마나 시원시원하게 빠졌는지 사실 분량으로 따지면 100여 페이지 정도의 분량이나 될까? 바울을 논하자면 머리가 지끈해지는 복잡하고 말장난들이 심해 난해한 구절구절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단연코 아니다. 로완 윌리엄스의 독특한 화법 때문인지. 그의 자상한 설명덕분인지 몰입감이 높다. 가볍지는 않지만 난독증을 불러 올 만큼 난해하지 않다.

우리 좀 친해진 것 같아요. 바울 아저씨.”

그 사람의 자라온 배경을 알면 그 사람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왜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지도 알 수 있고,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의 자세도 달라진다. 로완 윌리엄스는 바울을 이야기하면서 1장에서 그를 둘러싼 그의 세계를 소개한다. 그의 말 속에 녹아있는 당시의 문화 속으로 우리들을 인도한다. 더불어 바울이라는 사람의 외모와 말투에서 묻어나는 성격까지 세세하게 설명해준다.
바울. 그는 로마 시민이다. 유언장을 쓸 수 있으며 법정에 누군가를 고소해 세울 수 있으며 허락을 구하지 않고 결혼할 수 있다. 로마제국에 속한 도시라면 시민으로 모든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바울. 최고 학벌이다. 가말리엘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율법에 능통한 자이다. 이런 그가 홀아비로 추정된다. 그것도 건강이 좋지 않은 어쩌면 대머리였을 가능성도 높은 그런 평범한? 사람이다. 로마시민인 동시에 유대교 교사였던 그. 주를 만나기전 이단 색출 집단의 지도자였던 사울이였던 바울.
어려서부터 익숙히 보아온 예수님의 사진들. 오늘날 아이돌 못지않은 미남인 예수님은 왠지 근접하기 어려운 분이지만 로완 윌리엄스가 그리는 바울은 평범에 이르지 못하는 부족한 외모의 소유자다. 그의 뛰어난 지성으로 말미암아 왠지 더 서글픈 사람. 융통성 없고 제약이 많은 세계에서 예민하게 느끼고 뜨겁게 고뇌한 바울. 멀게만 느껴진 그가 오늘은 왠지 조금 가깝게 느껴진다. 나와 다르지 않아! 바울아저씨는......

나와 다르지 않은 그가 전하는 보편적 환대

그가 전하는 환대는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계획 하신 공동체로 우리를 받아들이셨으니 우리의 태도 또한 하나님의 태도를 닮아 환대와 받아들임의 태도를 갖추는(p66)이다. 또한 바울의 환대에는 자유의 의미(p70)가 포함되어 있다. 윌리엄스는 이것을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표현과 에클레시아라는 말로 설명해준다.

    주님으로 번역된 퀴리오스주인’‘지배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는 모호한 표현과는 거리가 멀고 조금도 종교적        인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을 씀으로써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는 소유권이 예수이게 있음을 그렇기에        인간이 다른 사람을 소유하려는 모든 주장을 상대화하는 소유권이 예수에게 있음을 표현했습니다.”p78     
    “ 에클레시아는 시민들의 모임을 뜻하는 그리스어입니다. 고대 지중해 도시들에서 에클레시아는 시민만이 참석해
      표결을 하고 특정 사안을 토론할 수 있는 회의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에클레시아라         고 불렀다는 것은 곧 하느님께서 온 세상에서 일어나는 공적 사안을 논의하는 회의에 모든 이(노예, 이주자 시민이         든 누군가나)가 참석하도록 부르셨다는 선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교회에서는 누구나 시민입니           다.”p92

모든 특권계층에 있었던 바울이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환대를 외치고 있다. 얼마나 무모하고도 도전적인 발언이었는지 새로운 준거틀을 만들어 나가는 그가 어떻게 핍박과 고난을 당하지 않겠는가? 바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편지를 통하여 드러내는 선한 삶으로 우리들이 나아가기를 명한다. 또한 내 행동이 이웃의 안녕과 온전함에 기여할 수 있는가(p137)경고하고 있다.
특정 차별 이념과 정책이 전 세계에서 재 활성화되고 있는 오늘날 코로나 바이러스가 도착하여 차별하는 우리가 우리 역시 차별되고 분리될 수 있다고 경종을 울린다.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국경에 갇히고 지역에 갇히고 건물에 갇히게 된다. 비록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이럴 때 우리가 가져야 할 진정한 환대의 답은 무엇일까? 새롭게 재건하고 각성되어야 할 부분들 바울을 통해 찾아가는 것은 어떨까?

사순절기간 바울 서신 읽기

마지막 장에는 사순절 기간 동안 바울 서신을 읽으며 묵상할 수 있는 자료가 첨부되어 있다. 비단 사순절 기간이 아닐지라도 바울에게 좀 더 다가갈 수 있는 , 아니 바울 서신을 통해 좀 더 주님께로 다가갈 수 있는 도움닫기 판이 되어주리라 기대한다.

기억하고 싶은 문장.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활동을 하시도록 하는 자유입니다. p75
모든 이가 존중받을 자격이 있으며 모든 이가 보호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이 한 분 하느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생기를 얻게 된다는 말의 참된 의미입니다. p90
바울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그가 자신이 속한 문화에서 받은 지혜를 재생산한다는 점이 아니라 현실을 뒤흔드는 복음의 새로움으로 인해 상호성을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p91
고난 가운데 예수는 버림받음, 하느님 부재의 경험과 같은 홀로 남겨진 인류의 운명을 압축해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위한 행동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의 소외라는 우리의 짐을 짊어지는 이 행위는 가장 기쁜 소식이 됩니다. 아무리 깊고 어두운 곳에 버림받는다 해도 이제 하느님께서 꿰뚫고 들어와 치유하시지 못할 곳은 없기 때문입니다. p116
그는 우리에게 하느님 아닌 것을 창조 그 자체로 끌어들이시는 하느님.(중요한 말을 다시 쓰자면) ‘환대를 통해 자신과 화해시키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드러냅니다.p122
베풂이란 가진 자들이 갖지 못한 자들에게 무언가를 친절하게 내미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서로 의존하고 있음을 모두가 깨닫고 자신이 가진 것을 이를 필요로 하는 이에게 주는 것임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p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