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갈 때는 깨워도 일어나지 않던 녀석이 새벽부터 서둘러 나갔다. 녀석의 첫 마라톤. 오늘이다. 아들의 도전10km완주. 길지도 짧지도 않은 거리 첫 마라톤으로도는 딱 좋다. 오늘을 위해 일주일에 2-3번 한 두시간씩 달렸다. 녀석은 달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면에 닿는 자신의 무게를 발바닥으로 느끼며 자신이 내뱉고 삼키는 날숨과 들숨에 자신의 무엇을 버리고 새롭게 채웟을까. 오롯이 무엇인가에 집중하면 모든 것이 무(無) 혹은 공(空)의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 그 안에는 오직 나만이 존재해서 스쳐지나가는 노란 은행잎도 빨간 단풍잎도 끝없이 연결된 하나의 선으로만 느껴질 뿐. 아들이의 세상에 나와 다른 이들은 들어갈 수 없고, 오직 자신만이 존재하는 그 시공에서 아들은 무엇을 발견했을까. 피아노 앞에 앉아서 자신의 음악에 심취한 모습은 익숙하지만 난 아직 달리는 녀석의 모습은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달리는 아들을 응원하는 까닭은 달리기가 시작되면 누구도 대신 달려주지 못하고 자신만이 그 거리를 감당해야 하듯 우리 인생또한 그러하니까.. 완주하는 작은 성취를 통해서 앞으로의 인생에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반환점과 도착점을 잃어버리지 않고 달려나가길 소망하는 까닭이겠지.
점심무렵 한인마트에 가서 단감을 사왔다. 이만큼 나이를 먹으면 사연없는게 뭐가 있을까만은.. 단감을 보는 순간 그날의 일이 떠올랐고, 집에 돌아와 열심히 사진첩을 찾았지만 찾을수가 없었다. 통도사안에는 작은 암자들이 몇 있는데 그 중 서운암이 있다. 그곳은 맛있는 된장으로 유명한 곳인데 볕이 잘 드는 산마루에 펼쳐진 장독대는 버선코를 닮은 암자의 지붕과 너무나 잘 어울어졌고, 허리를 두른 대나무나 까치밥으로 남겨둔 감나무와도 아름답게 어우러졌다. 우리는 곧잘 이곳을 찾았다. 된장을 사기도 했고, 가을이면 단감을 사기도 했다. 박스채 마당에 던져두고 맛배기로 깎아먹으라고 과도까지 있었다. 나는 과도로 야무지게 단감을 깎아 먹었다. 맛배기니까 하나만 먹어야지 하면서도 연거퍼 몇 개씩 깎아 먹는 나를 보고 당신은 곤란한듯 웃어보였지. 비닐 한가득 그것을 사서 집에 올 때면 마치 가을을 온통 집으로 가져가듯 마음이 넉넉해졌지. 분명 그날 감을 깎아 먹는 사진이 있었는데 도무지 찾을수가 없으니...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흔적은 사라져 가는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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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감은 야무지게 단단한 씨가 박혀있어야 제맛인데 이곳의 감에서는 씨를 찾을수가 없다. 왜인지.. 종자가 다른 것인지 아니면 일찍 따서 숙성시키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감을 입에 물고 오물거리니 나는 감을 먹는 것인지 추억을 먹는 것인지 내 나라를 먹는 것인지 헷갈리게 되네. 아름다운 뉴욕, 그럼에도 내게는 이곳보다 더 아름다운 내 조국의 가을 산의 풍요가 더욱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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