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시

시란 이런 것.

huuka 2023. 10. 17. 02:44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최승자
.
겨울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 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없이 오래 찔렸다
.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오래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
그리고 지금, 주인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
어디 시뿐이겠는가? 흘러나오는 많은 노래가 미처 표현하지 못한 나의 감정을 표현하고, 나조차 깨닫지 못한 감정들을 각성시키는 기능말이다. 한편의 시가 입술에 머물고 그것보다 더 오래 마음에 남아 결국은 숨겨진 감정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시간. 나를 아프게 한 시간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은 아직 상흔이 남은 까닭이겠지. 그럼에도 얼마간의 다정과 따뜻한 불빛이 그리운 것은 내가 사랑한 까닭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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