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

페터한트케. "관객모독""어느 작가의 오후"

huuka 2020. 2. 17. 14:06

관객모독이라는 연극으로 우리들에게는 알려진 페터 한트케가 2019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서점가는 그의 수상소식과 더불어 그의 작품들을 전시하기 시작했고, 그런 미끼를 빠짐없이 물고야 마는 호구인 나의 손에는 어김없이 그의 책 5권이 들려 있었다.

  < 1. 관객모독 >

관객모독을 만난 것은 90년대 대학시절 홍대 앞 소극장에서였다.
그 당혹스러움이란 무방비상태에서 성인물을 접한 아이와 같았다. 뚜렷한 사건이나 일반적 갈등구조 없이 덩그런 무대에서 몇 명의 배우가 가하는 언어폭력 앞에 교양 있는 지식인으로 있기가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연극 관객모독은 오늘날까지 꾸준하게 연극무대에 올려져 사랑받고 있다. 무엇이 이 실험적인 연극이 계속해서 상연되고 인기를 얻게 하는 것일까? 모르긴 하지만 언어가 감각적으로 해체되는 것에 익숙하고, 사회적 감각이 많이 발달한 오늘날의 관객에게 맞춤형 작품으로 인식되는 까닭은 아닐까.

언어는 과연 의미를 지녀야 하는가? 아니 보통 의미가 없는 언어는 소리라 구분하고 그 소리에 의미가 입혀져야 그것을 하나의 언어로 명명한다.

그러나 페터 한트케는 이를 거부한다. 언어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가 연극 그 자체일 수 있으며 의미가 없어도 무방하다. 언어극이라 칭하는 이 작품은 배우들의 말장난으로 시작하여 다양한 언어유희를 펼치며 마지막에 가서는 관객을 향해 야유와 욕설을 퍼 붓는다 이를 통해 관객을 긴장시키며 관객들이 낯섦을 가지고 연극 자체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그렇다면 연극만 그럴까? 그렇지 않다.

원작을 들여다보아도 관객모독은 희곡의 형태로 적혀져 있지 않다. 이것이 연극으로 올려 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나보다. 한트케가 처음으로 이 글을 가지고 간 출판사대표역시 출판도 공연도 불가한작품으로 판단했으니 말이다.
전통적인 희곡의 형식과 관습을 거부하고 파격적인 언어로 현실의 위선과 부조리를 드러낸 문제작으로 일컬어지는 관객모독은 다시금 읽어도 연극도 작품도 나에게는 거북한 그 무엇이다.

  < 2. 어느 작가의 오후 >

  작가의 눈으로 바라본 일상. 이 글을 처음 대할 때 떠오른 것은 박태원 작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라는 작품이었다. 1930년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박태원이 자신의 창작 방법론으로 제시한 고현학(현대적 일상생활의 풍속을 면밀히 조사 탐구하는 행위)을 적용시킨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 소설의 구성방식을 따르지 않고 작중 화자의 관찰과 심리가 서술되고 있는 것으로 소설이라 생각하고 손에 잡았다가 여간 낭패를 보지 않는 작품중 하나일 듯하다.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역시 그러하다. 특별한 사건이랄 것도 없이 흘러간다. 하염없이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이 스토리다. 나는 이런 구조의 소설이 조금 힘에 부대낀다.
작품 속 구석구석 심어놓은 작가의 의식을 따라 가려면 독자인 나는 더할 나위 없이 바쁘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나의 생각을 접어두고 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가 생각하는 것을 나도 생각하게 되고 그의 고민에 대해 나도 함께 고민해야만 하는 강요가 무언중에 담겨있다.

복잡한 사건 사고나 갈등이 없이, 지극히 단순하고 극적이지 않기에 더욱 사고의 집중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런 류? 아니 적어도 박태원의 작품이나 한트케의 작품에는 다이나믹한 사건을 대신할 수 있는 작가의 세세한 사물을 바라보는 관찰과 치열한 사유와 단조로움 안에 감추인 치밀한 문장이 있다. 그래서 일반적인 소설을 읽어나갈 때 보다 몇 배 이상의 긴장과 집중이 지루함 속에 담기게 된다.

눈 내리는 가운데 혼자 걸음으로써 이제 막 얻어진 익명성은 계속 지켜졌다. 그것은 언젠가 <한계의 제거><자아의 제거>로 불리었을 체험이었다. 마침 내 바깥에서 사물들 곁에서만 존재하는 것, 그것은 일종의 감격이었다. 순간 눈썹이 아치형으로 휘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다 이름에서 벗어난 존재한 것은 정말이지 감동적이었다.”p73-74

내가 알기로는 나와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유독 나만이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그것도 날이면 날마다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오. 그리고 밤이면 밤마다 같은 악몽을 꾸었는데 그 내용이란 것이 얼마 안 있으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야 했거든? 그런데 말이여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의 텍스트가 있는데 나만 빈손인 거야. 그런 상황에서 완전히 무감각한 문장으로 이미지도 리듬도 없이 꿈이 끝나 버렸을 때 나는 영원히 글쓰기를 금지당한 것으로 받아 들였다오. 더 이상 자기 텍스트를 가져서는 안 된다. 그날 더없이 뜨거운 태양 속으로 걸어가서 몇 시간 동안 꽃피는 사과나무 아래서 마치 썩은 시체처럼 서 있었던 기억이 나는구려.”p108

글쓰는 업을 가진 자의 고뇌가 한 문장 한 문장안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자신이 글이 되는 그 순간까지 끝없이 관찰하고 그 사물가운데 체득되는 경이. 언어를 다루는 그의 세상은 놀람움 그 자체이지만 여전히 내게는 어려운 그와 그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