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아픈데 멈출 수가 없는 이야기가 있다.
“82년 김지영”책을 읽었을 때도 그러했지만 영화를 보고 온 날.
그녀의 삶을 이해하지 못함에서가 아닌 그녀의 삶보다 박한 삶을 당연한 듯 살아온 내가 가여워 복받쳐 오른 눈물을 한동안 삼켜야했다.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 역시 그렇다.
체코 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필생의 역작이며 국내 소설가 50인이 뽑은 2016년의 소설.
페이스북에서도 한동안 회자 되었던. 글 좀 읽고 쓴다는 사람들의 애독서다.
수려한 글이 주는 멋진 표현그릇에 담겨진 속 이야기는 아리고 아린, 묵묵히 성실하게 한 시대를 살아가다 종국에는 그 시대를 따라가지 못해 폐지처럼 버려지는 나의 모습이고 당신의 모습을 그린다.
삼십 오년째 폐지더미속에서 일하는 주인공 한타.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그 일 속에서 진주를 발견하여 일상을 성실히 살아가는 그.
그의 모습에 나의 모습이 투영되는 건 무슨 까닭일까?
“사실 내 독서는 딱히 읽는 행위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 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 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그런 식으로 나는 단 한 달 만에 2톤의 책을 압축한다.p10” |
첫 장을 펼치자마자 마음을 사로잡는 기가 막힌 표현이다.
단순한 폐지 압축공이 아니다. 폐지를 압축하듯 독서를 통해 사상을 그는 압축해나간다.
그의 독서는 읽는 행위가 아니라 종국에 자신이 압축되어버릴 책이 되어 가는 과정이다.
그런 한타 이기에 자신을 돈키호테에 비교하는 것은 당연한 것.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 호테다. 영원과 무한도 나 같은 사람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p19. |
반복되어 표현되는 인간적이지 않은 하늘은 누구에게나 펼쳐진 공평임에도 공평일수 없는 잔혹과 차별의 음울함을 더해가고 그의 머리위로 쏟아지는 폐지들 사이로 빠르게 세상의 정권과 사상이 지나간다.
웅크린 말들 속에 살아가는 한타로서는 그 변화를 활자로 익힐 뿐. 몸은 따라가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동시성을 띤 왕복 운동이며, 만사는 절룩거리며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진 덕분에 세상은 절름발이 신세를 면한 세상이다(p69).인간적이지 않은 하늘아래 주인공을 인간으로 살 수 있게 한 것은 집시여자였다.
“그저 책이나 갉아먹고 폐지 더미에 뚤린 구명 속에 살며 그 작은 둥지 안에서 새끼들을 낳고 키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 라지 않는 소박한 짐승들인데 추운 밤이면 내 품안에서 공처럼 웅크렸던 내 어린 집시 여자처럼 몸을 사린 생쥐들이다. |
어두운 지하. 35년째 폐지를 압축하고 살아가고 있는 너무 시끄러운 고독속의 한타를 구원 할 수 있는 것은 연민이었던 것일까? 그런 까닭에 그의 삶의 마지막에는 완전히 삭제된 그것이 너무도 뚜렷하게 복원된다.
“어린아이가 쓴 듯한 큼직한 글씨가 쓰여 있다. 일론카. 그렇다 이젠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다.”p132 |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 내가 사랑하는 대상들의 소멸, 그들과 함께한 일상의 아름다움은 허무와 비애로 그려짐에도 불구하고 삶은 아름답다고 힘 있게 오늘을 살아가라고 격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대화된 작업 방식과 규격화된 개인주의적 문명을 살아가는 젊은 노동자들에게 밀려 결국 자신의 압축기에 몸을 던지게 된 한타. 폐지를 압축하는 그의 행위는 단순한 생계수단이 아닌 부조리에 대항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였고, 그의 손에 건져진 책은 인간의 정신과 문화를 구하려는 항거다. 그런 까닭에 그는 너무 시끄러운 고독속에 살아갈 수밖에....
"이 일을 제대로 하려면 대학 교육을 받았거나 적어도 제대로 된 인문학 교육을 받았어야 하리라 최적의 조건은 신학학위가 아닐까 싶지만. 내 직무를 이행하는 과정에서는 나선과 원이 상응하고 프로그레수스 아드 푸투룸과 레그레수스 아드 오리기 넴이 뒤섞인다. 그 모두를 나는 강렬하게 체험한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행복이라는 불행을 짊어진 사람인데 프 로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과 레그레수스 아드 푸투룸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이제야 깨닫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저녁식사 를 하며 프라하 석간신문을 읽듯이, 이제 나는 그런 생각들을 소일거리로 삼는다."p70 |
뜻하지 않은 행복이라는 불행을 짊어진 한타. 그는 쏟아진 책들의 길사이에서 그는 답을 구했지만 결국 그는 답을 찾지 못했다. 자신의 절대 진리앞에 외면당한 그는 압축기로 향한다
"만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상도 하지 않았던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평생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멀리까지 간 사람이 만차였다. 책들에 둘러싸인 나는 책에서 쉴새없이 표징을 구했으나 하늘로부터 단 한 줄의 메시지도 받지 못한 채 오 히려 책들이 단합해 내게 맞섰는데 말이다. 반면 책을 혐오한 만차는 영원토록 그녀에게 예정된 운명대로 글쓰기에 영감을 불어넣는 여인이 되어 있었고 심지어 돌로 된 날개를 퍼덕이며 비상했다."p104 |
아프다. 왜 아픈 지도 모른 체 끙끙 앓고 있는 나 자신을 본다. 그럼에도 또 읽는다.
한타처럼 나의 독서역시 길을 잃었다. 많은 배움이, 축복이라 여겼던 독서가. 지식이, 신학함이 아픈 이 시대를 살아가는데 다 부질없게만 느껴진다. 그런까닭에 끙끙 앓는지도 모르지......
"태양만이 흑점을 지닐 권리가 있다." - 괴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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