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하나님께 소리치고 싶을 때 - 욥기

huuka 2017. 10. 5. 23:15

<독서와 영성이야기 >하나님께 소리치고 싶을 때 - 욥기 / 크레이그 바르톨로뮤. 이레서원

2017.10.05


하나님은 귀머거리다.


그렇지않고서야 왜 나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일까? 이번만큼은 조금 지나친 감이 있다. 오랜 경험에 나의 하나님은 25시의 하나님이셨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는 훨씬 많은 시간을 기다림에 사용하게 하셨고 참고 인내하는 견딤의 시간을 허락하셨다. 그래서 나의 하나님은 25시의 하나님이시다. 안다. 나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은 다르다는 것을..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좀 심하시다. 아무래도 부르짖는 소리가 너무 많아서 왠만한 소리는 들리지 않으시는듯 하다. 얼마나 더 울부짖어야 들으시는가? 얼마나 하나님께 소리쳐야만 하나님은 들으시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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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딤의 나날이다.나의 하루하루가 견딤의 나날이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고난앞에서 설 때 "욥"을 떠올리고 "욥기"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잘 안다. 아무리 작은 나의 고난일지라도 욥의 고난보다 훨씬 더 크고 중하다는것을. 또한 욥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세밀히 듣지 못하는 자기 중심의 자신과 그렇게 오래 참고 견디지 못함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욥을 만나게 된다. 고난의 자리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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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그 바르톨로뮤의 하나님께 소리치로 싶을 때를 펼쳤다. 문제앞에 해답지를 펼치듯 말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답은 없었다. 다만 이미 알고 있을지라도 다시금 명징하게 그는 하나님께서 욥에게 주신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두 가지 근본진리를 정리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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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피조물이다. 둘째 하나님은 이 우주를 강력하게 또 종종 불가해한 방식으로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서 욥의 유한함이 명백히 나타나긴 하지만 그 초점은 바로 이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여호와의 능력과 지혜에 있다. 곧 불가해한 일들과 반복적인 고난 속에서도 사랑과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겸손히 행하도록 이끄시는 것이다.p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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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이러한 불가해한 방식의 일함심에 관한 지혜가 필요한데 그 지혜는 단순한 지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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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혜는 그저 하나님을 머리로만 아는 지식이 아니라 그분을 실존적으로 아는 지식이다. 우리는 그 지식이 우리의 존재 전체에 스며들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게끔해야 한다. 욥기는 이 과정이 종종 고통스러운 것이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때로 우리는 용광로 같은 단련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것이다.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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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안다. 유한한 사람의 생각으로 무한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다 알 수 없다는 것을 , 하나님의 불가해한 방식의 일하심은 일종의 신비로 우리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은 순종과 소망의 기다림이라는 것이지만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횟수가 빈번할 수록 낙심되는 마음과 상한 심령은 어찌 할 수가 없다. 그 시간의 오래됨과 빈번함에 주위로부터 조롱거리가 될 때에도 크레이그 바르톨로뮤는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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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장기간 골치 아픈 일에 시달리는 이들을 홀대하는 못된 습관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 골치 아픈 경험속에 깊이 관여하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점 그럼으로써 그 과정에서 놀라운 일들을 드러내실 수도 있다는 점을 헤아리지 못한다. 우리는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도 고난받을 수 있음을 생각하면서 십자가의 기독교를 회복해야 한다. 그런 고난을 견딘 후 우리는 주님이 그 고난을 통해 이루신 일들을 보면서 놀라게 될 것이다.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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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주위분들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크게 사용하시려고 이런 고난을 전도사님께 주시는가봅니다." 위로로 하시는 말씀이지만 이 말씀처럼 두렵고도 모호한 말이 없다. 하나님께 크게 사용됨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의 시간들을 사역의 현장에서 사용하게 하실 것이라는 것. 고통을 통하여 연약한 자들과 그 고통속에 거하는 자들과 함께 함을 가르쳐 주고 계시다는 것을..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들의 고통가운데 함께 하셨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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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지금 나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은 무엇일까? 소리쳐 나의 모든 것을 아버지 앞에 토로할 때, 언제나 함께 하신 그 신실하심으로 대답하실 아버지의 음성을 놓치지 않는 세밀한 귀를 가지고 있는가? 불가해한 방식으로 일하시는 그분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있는가? 오늘 나는 하나님께_소리치고_싶을_때를 통해 이 두 가지에 답을 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이 귀머거리가 아니라 내가 귀머거리인것은 아닌가? 이렇게도 하나님은 다정한 아빠하나님으로 듣고 응답하고 계신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