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부임한 교회에서는 성도들을 위한 아카데미를 실시하고 있었다. 상반기 나에게 주어진 과목은 “묵상 : 말씀과 동행하기”였다.
첫 시간 렘블란트의 “돌아온 탕자”의 그림을 가지고 “자세히 보기, 오래 보기, 넓게 보기, 좁게 보기”라는 명제를 묵상의 key로 제시했다. 그리고 매시간 산상수훈의 한 구절에서 한 단락을 가지고 한 주간 살아내고 그 삶을 적어 발표했다. 그 시간을 경험하면서 구성원들의 공통된 고백은 익히 안다고 생각했던 본문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너무 많이 들어왔던 뻔한 설교의 본문들이 개개인의 삶 속에 낯설게 침공해 왔다고 했다. 그 낯섦이 작지만 변화를 가져오고 낯섦속에 다가오는 주님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고 말한다.
말씀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시대다.
텔레비전를 통해, 유튜브를 통해, 한 번의 터치로 다양한 아니 입맛에 맞는 말씀을 골라 먹고 즐길 수 있다. 그런 까닭에서일까? 더 이상 말씀이 낯설지도 그 가치도 느껴지지 않는다. 병풍처럼 우리를 둘러선 말씀. 스쳐지나가는 풍경처럼 존재하나 그 존재감을 느낄 수 없다. 어디 텔레비전 유튜브 뿐일까? 출판계역시 홍수처럼 쏟아내고 있다.
그 홍수속에 한 권의 책이 우리 손에 다가왔다. 김동문 선교사님의 <낮은 자의 예수님을 만나는 중근동의 눈으로 읽는 성경 – 신약 편>이다.
처음 구약 편을 만났을 때의 감동을 난 아직도 기억한다.
줄글보다 그림으로 가득 찬 책. 친절한 설명보다는 고민하게 만드는 던져진 글. 몇 번을 읽어도 새롭게 읽혀지는 신비를 지닌 책. 그럼에도 뚜렷한 메시지를 안겨주는 책. 그때 그 감동.
구약에 이은 신약 편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꿰고 있다고 생각한 예수님의 생애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준다. 더불어 김동문 선교사님은 친절히 구약 편과 다른 신약 편은 “하나의 묵상(p11)”이라고 설명해준다. 묵상은 삶과 구분되지 않는 말씀의 세계로 우리들을 인도해준다는 것, 선교사님이 먼저 고민하고 사색하고 치열하게 살아내면서 완성된 책이라는 것 아닐까?
이 책은 선교사님의 프롤로그로, 그림을 담당한 신현욱목사님의 에필로그로 열고 닫는다. 그 사이에는 예수님과 바울을 중심으로 한 16개의 성경이야기가, 그 사이사이에는 오감으로 만나는 중근동 문화라는 아트클이 삽입되어 있다.
나는 책을 잡으면 먼저 목차를 읽어보고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읽는다. 그리고 목차에서 흥미를 끈 부분이 있으면 그것을 먼저 읽고 처음부터 다시금 읽어 흥미를 끈 부분은 결국 두 번은 읽고 책을 덮게 된다. 그렇다면 이번에 제일 먼저 펼쳐 든 이야기는 무엇일까?
일단 목차를 훓어 보자.
소제목들이 기가 막히다.
‘갈릴리 호숫가 언덕 위의 들꽃 같던 무리들.’ ‘ 투명 인간이었던 사람들’ ‘바울이 텐트메이커라굽쇼?’ ‘디오니소스, 에로스, 그리고 심포지엄’ ‘경기장의 선수보다 치열하게 전장의 군사보다 비장하게.’
얼마나 제목들이 참신한가! 문학성, 현대적 감각. 모든 것이 느껴지지 않는지....
구약에 이어 신약 역시 신현욱 목사님이 그림을 그려주셨다.
신목사님의 그림은 자세히 보게 하고, 오랫동안 보게 해서, 그림 그린 사람의 의도와는 달리 나만의 해석을 붙이게 되는 재미가 있다.
p6-7쪽은 푸른 초장이 펼쳐져 있고 그 위에 제자들과 무리들과 함께 계신 예수님이 그려져 있다. 자세히 보면 염소와 양도 함께 그려져 있다. 근데 우리들에게 익숙한 양의 얼굴보다 염소의 얼굴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양은 오히려 엉덩이 부분이 그려져 철저히 그 얼굴이 숨겨져 있다. 이어 목차위에 그려진 양의 얼굴을 보라. 결코 우리들에게 익숙한. 아니 전편인 구약 표지에 그려진 양의 얼굴이나 구약 편의 p129, p184, p210에 그려진 양과는 전혀 다른 “성격이 느껴지는” 범상치 않은 양의 얼굴을 만나게 된다. 신현욱 목사님 무슨 의도가 있는 것인가요? 나만의 착각인가요?
전편에 비해 훨씬 많은 그림을 그려 넣어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지만 그림 그리는 신목사님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그 수고가 참 고맙다.
수많은 설명보다 확실히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그 무엇이 있지 않은가?
“유대왕의 탄생을 눈치없이 축하해요.” p42
그림뿐 아니라 센스 가득한 말풍선에 써진 글들은 본문의 설명을 쉽고 풍성하게 해준다.
산상수훈의 영향이었는지 ‘들꽃 같던’ 이라는 제목에 이끌린 탓인지 모르지만 제일 처음 펼친 이야기는 “갈릴리 호숫가 언덕 위에 들꽃 같던 무리들”이었다.
갈릴리 호숫가 언덕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모여드는 무리를 보니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애써 눈길을 피하고 싶다. 일일이 찾아 모아도 이런 조합은 되기 힘들다. 가난한 이들. 몸이 불편한 이들. 귀신들린 자. 창녀, 어떻게 모여도 이런 사람들만 모였을까? 하지만 자세히 보라. 그 무리들 가운데 예수가 서 계신다. 연약한 몸으로 모진 바람을 견디며 흔들리는 들꽃, 주의하지 않으면 아무렇게나 밟혀버리는 들꽃. 그 들꽃 같은 그들에게 예수님은 한 명 한 명 눈을 맞춘다. 그리고 짓밟힘이 일상이 되어버린 그들에게 “너희가 바로 신의 아들p75”이라고 말씀하신다.
“들판에 있던 사람들 중에 누가 진정 복된 자들일까? 가이사가 가져다준 평화와 번영을 누리던 로마 시민인가? 일상은 고되고 힘들지만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듣고 이미 임한 그 나라를 기뻐할 수 있었던 소외된 자들인가?p77”
전편만한 속편 없다는 말은 이미 옛말이다. 영화계는 이미 시리즈물로 도색되었다. 구약편에 이은 신약 편 역시 소장각이다. 많은 이들이 읽고 새롭게 다가오는 말씀의 은혜를 누리며,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상상의 나래도 펼쳐보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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