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

글쓰는 여자의 공간.

huuka 2018. 8. 8. 23:40

글쓰는 여자의 공간. / 타니아슐리 지음, 남기철 옮김. / 이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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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아래 모든 것들이 여물어 성숙해감을 보지만 나는 끝없이 쇠락(衰落)을 맛본다. 무엇이 옳다 틀렸다의 판단의 문제가 아니다. 메뉴얼대로 움직여야 한다. 아니 메뉴얼대로라고 말하지만 난 두려움을 가졌고 그 메뉴얼뒤로 나를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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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난 경찰에 도움을 청하는 수화기를 7번 들었다. 그 7번에 전화대응 2번과 출동 5번이 있었다. 편의점 냉장고를 자신의 냉장고처럼 이용하는 알콜 중독자때문이다. 그가 가져간 물건은 고작 4만원 남짓. 한번에 소주 한두병. 그리고 아이스크림 한개. 그 사람의 이름을 안다. 사는 곳을 안다. 어머니도 안다. 또한 아들의 행동을 아는 어머니가 돈을 갚아주기도 하신다. 그럼에도 메뉴얼대로 신고를 했다. 그 신고가 쌓이면 고소가 되고 법대로 벌금을 감당하든지 형이 집행된다. 가난한 그 가정이 감당할 수 있는 돈이 아니다. 알콜중독자재활병원에 아들을 보내고 싶어도 돈이 들어 엄두를 못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삶의 고리들. 사람을 해치고 싶어도 그럴 힘조차 가지지 못한 환자다. 그런 그를 향해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코를 찌르는 역겨운 냄새. 그가 흘리는 침. 내뱃는 말들. 그가 잡은 문의 오물 묻은 손자국까지... 불쾌감이 아니라 내게는 두려움을 가져왔다.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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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이 지나도 월급을 받지 못했다. 15일이 월급날이란다. 꼬박 7주를 일하고 4주간 일한 월급을 받는 메뉴얼이다. 참 지랄맞다. 돌아오는 길. 서점을 들렀다. 책 냄새가 주는 안정이 필요했다. 책 한권을 샀다. 15일까지 버텨야하는 자존심을 책한권과 바꿨다. 어제 오늘 시간을 쪼개 읽기를 마쳤다. 무엇때문에 나는 열심으로 이 책을 읽었을까? 시간과 피곤을 무릎쓰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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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얼은 없는 사람, 연약한 사람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가진 자. 강한 자들을 지켜주는 철옹성(鐵甕城)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을 무엇때문일까? 내가 두려워한 것은 그가 아니라 밑바닥 인생의 처절. 비참. 굴욕, 나의 탐독(耽讀)은 그 두려움의 도피. 비굴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럼에도 글을 쓰고 싶어졌다. 나는 글을 쓰고 싶다. 글을 쓰고 싶다. 그것이 도피든 비굴이든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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