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은 애수의 소용돌이 안에서만 생기가 넘치는 모양입니다." - 하야시 후미코.
삼등여행기 / 하야시 후미코 /안은미 옮김 / 정은문고
이름이 낯설다. 기실 일본작가들이 우리나라에 알려지고 그 책들이 번역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인기를 누리는 작가 히가시노 기에고, 무라카미 하루키, 요시모토바나나등도 한국에서 인기의 뿌리를 타고 올라가자면 10년이 안 된다. 하물며 1903년생인 하야시 후미코의 이름이 낯선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소개를 보자.
1903-1951.일본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 가난한 부모를 따라 여러지방을 떠돌아다녔다.여학교 졸업 후 토쿄에 올라와 잡일꾼 사무원 여공 카페 여급등 갖가지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작가를 꿈꾸며 고단한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1930년 자신의 가난한 삶이 그대로 녹아있는 "방랑기"를 출판해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했다. 1948년 제3회 여류문학자상을 수상했다.
그녀의 여행은 특별한 일이 아닌 어려서부터 몸에 익은 삶이었다. 행상을 하는 부모를 따라 이지역 저지역을 떠돌며 익숙해지지 않는 낯선 속에서 자신의 애수를 활자화 시켰다.
"내 영혼은 애수의 소용돌이 안에서만 생기가 넘치는 모양입니다."p219
<삼등여행기>는 "방랑기"의 인세를 들고, 홀로 파리를 향한 여행기를 기록한 내용이다. 가는 길은 육로를 따라, 오는 길은 배를 이용했다. 여자 혼자 그 때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결코 녹녹한 여행길이 아니였음에 분명한데, 그녀의 이러한 여행의 용기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녀가 여행을 시작한 때는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전쟁이 시작되고 있을 즈음이었고, 그녀가 선택한 육로는 반일 감정이 극심한 중국을 지나는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여행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살아냄, 또한 그녀 자신이었기에 이러한 것이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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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등여행기>에는 낯선 환경들과 더불어 아직 사람냄새 나는 이방인들을 만난다. 누가 이방인일까? 작고 노란 후미코가 이방인일까? 아니면 그녀의 눈에 비친 이들이 이방인일까? 말을 걸어오는 이질의 형체를 갖춘 그들은 후미코에게는 이방인이 아니었다. 돈을 구걸하고 함께 유하기를 청한다. 이질감은 거부를 생산하지만, 후미코는 그 이질감에 손을 내밀고 침대를 내어주고 식료품을 나눈다. 자신의 하루를 그들의 삶과 함께 영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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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여행은 그녀의 글에 생기를 부여하고, 적어낼 수 있는 힘이 된다. 이 여행 후 그녀는 몇 편의 글을 쓰게 되고 영화화 되며, 여류작가로서의 짧은 삶을 누리고 심장마비로 죽게 된다. <삼등여행기>에는 그녀가 마주한 중국, 러시아, 파리, 영국, 나폴리에서의 특별하지만 평범한 삶의 이야기가 그녀만의 담백한 언어로 기술되어 있다.
"창에 이마를 대고 자작나무가 눈보라에 부러질 듯 비틀비틀하는 숲을 바라보는 내게 페름 군이 탱고의 한 구절을 불러줍니다. 어찌하여 러시아인은 이토록 노래를 사랑하는 걸까요. 차라리 이 사람의 아내가 되어 페름에서 내려버릴까 하는 자포자기 심정에 잠시 빠졌지만 여하튼 말이 통하지 않는 데다 60센티미터 남짓 키 차이가 나서 단념했습니다. 페름까지는 아직 며칠 더 가야 하므로 즐기기에는 충분했습니다."p28
후미코가 어떤 감수성을 가진 사람인지 충분히 설명하고도 남는 표현 아닌가? 그녀의 솔직함과 발칙함이 오히려 사랑스럽게 글에 스며있다. 잘생긴 남자를 보고 따라내리고 싶지만 키 차이에 단념하는 그녀의 순수가 여간 귀여운게 아니다. 낯선 사물과 경치를 보며 내면을 읽어내며 애써 꾸미려하지않는 소박한 그녀의 작가로서의 눈이 참 부럽기도 하다.
"시베리아의 추위는 어딘가 정열적입니다. 열차가 멈춰 설 대마다 엘레짓가루처럼 비걱비걱한 누을 밟고 어슬렁어슬렁 둘러보니 다들 모피 안감을 댄 외투를 입고 발에는 양털로 짠 두툼한 방모로 만든 장화를 신고 잇습니다. 쇠막대기에 손끝이 잠깐 닿기만 해도 얼어붙는다고 보이가 알려주더군요. 이번 여행에서의 최고의 즐거움이자 플롤레타리아적인 것은 뜨거운 물을 각역에서 거저 얻은 일입니다.p32"
"나는 자면서 어렴풋이 생각했습니다. 언제나 진실한 것은 파묻혀 지나가고 다소 연극적인 것이 으스대는 것이 상스럽게 비하하는 자들이 어이없게도 어느 나라든 특권을 갖는구나. 프롤레타리아라는 하이칼라언어를 쓰지 않아도 기나긴 삼등 열차 여행에서 굉장치 착하지만 가난한 사람을 수없이 봐왔습니다."p65
"파리는 얼마나 밝고 너른 거리일까 상상했는데 겨울 파리는 새벽녘이든 저물녘이든 전혀 어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우윳빛 땅거미가 져서 잠들기에 딱이었습니다."p74
"에펠탑에 올라가도 별로 재미있지 않을 것 같다고 했더니 이러더군요.'밑에서 바람이 불어 올라와 얼마나 기분이 좋은데'파리는 가벼운 곳입니다. 그녀는 품위 없는 곳만 바라봅니다.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불우하기에 품위 있는 곳과 인연이 없습니다."p88
"어쩌면 외국에 있는 일본인이 어리석어지는 이유는 외국에 머물면 햇볕을 많이 쬔 귤처럼 일본이란 나라는 반짝반짝 빛나지만 그 섬 위세 사는 사람의 얼굴은 전부 흐릿하게 보여서일지도 모릅니다."p147
"바람에 흔들흔들하는 나무 사이를 자동차가 꽤 빠른 속도록 가는데 마음이 아련해집니다. 나그네의 심약함이겠지요. 조릿대처럼 나긋나긋한 애나무들을 지나칠 때는 하늘만 쳐다봤습니다. 마치 내가 여울을 거슬러 오르는 은어가 된 듯한 기분바저 들어 물고기의 마음으로 물고기의 모습으로 차가운 여울을 헤엄친다면 줄거울까? 이런 공상도 해봅니다."p185-186
후미코에 관한 번역자의 글을 끝으로 옮겨본다.
"후미코는 지독한 가난 속에서 늙은 부모를 부양하고 이런저런 남자들로부터 상처를 받았음에도 씩씩하게 자신의 삶 한가운데를 터벅터벅 걸어갔다. 때론 술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하고 때론 사랑에 배신을 당해 가방 하나를 들고 여행길에 오르는 그녀는 하여간 무모했고 건강했다. 여행길에 오르는 순간 누구나 이방인이 되지만 후미코의 말마따나 "사람들은 무한한 우주 공간에서 평범한 삶이 만들어내는 슬픔에 감동한다."하여 <삼등여행기>가 단순한 여행기에서 끝나지 않는 건 그 바탕에 이방인의 눈으로 바라본 '낯설지만 익숙한' 서민의 삶. '예나 지금이나 그리 변하지 않은' 프롤레타리아의 삶이 담백한 언어로 묘사돼있어서다. 또 갈피갈피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여성으로서의 삶을 성찰한 그녀의 솔직한 모습을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p238-239
"일본에 돌아온 나는 어쩐지 눈부셔 눈을 뜨는 일조차 고통스럽습니다. 눈부심을 참고 눈을 활짝 뜨면 눈꺼풀을 억지로 쳐올린 것처럼 눈물이 넘쳐흐릅니다."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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