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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대에 선 그리스도 / 우리의 판단을 뒤흔드는 복음에 관하여.
로완 윌리엄스 지음. 민경찬 손승우 옮김 비아 출판
34. 마르코가 그리는 세계는 이치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가 아닙니다. 이 세계는 온갖 악령으로 가득합니다. 고통이 끊이질 않습니다. 권력이 끊임없이 남용됩니다. 이러한 세계에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진정으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세계에서는 그에 관해 어떻게 말하든 간에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이 세계가 지닌 광기의 옷을 입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세계에서 예수에 대해 무슨 말을 듣든 사람들은 그를 세상의 권력을 탐하려 하는 또 다른 야망가로 모든 일을 제 마음대로 결정하는 무책임한 폭군으로 재단할 것입니다. 이 세계의 말들로 예수를 묘사하는 순간 그는 이 세계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차지하려 하는 여러 경쟁자 중 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는 비진리의 일부로 전락합니다.
44. 마르코가 그린 심판대에 선 예수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시는 자리입니다.
45.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광기로 가득 차 있으며 폭력으로 얼룩진 이세계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저항자와 마주했을 때 영광의 하느님께서 그를 통해 당신을 드러내셨음을 바로 지금 여기서 깨닫는 것뿐입니다.
51. 복음은 낯선 이야기, 낯선 소통 방식을 통해 그 안에 담긴 핵심 주장이 얼마나 낯선 것인지를 사람들에게 상기시키며 살아 숨 쉽니다. 그 핵심 주장이란 이 세계로 오셔서 버림받고 실패하고 끔찍한 고난을 받으며, 생을 마감한 이를 통해 하느님께서 이 세계를 다시 빚어내셨다는 말입니다.
55. 복음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의 복음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복음은 우리에게 현실에 집중하기를 요구합니다. 이 현실은 ‘지금 여기’ 우리 눈앞에ㅓ 우리의 배경으로 그리고 우리 안에 있습니다.
57. 기도는 몸과 마음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들을 도외시한 채 그러한 것들에서 철저히 벗어나 자신을 추상화한 다음 다른 어딘가 경건과 거룩함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멈추어 서서 기도한다는 것은 인내를 가지고 자기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주의를 기울이는데서 시작됩니다.
58-59. 관조란 순전한 있음인 하느님과 대면하는 것. 심판대에 선 예수는 자신이 하느님의 생명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이는 결코 파괴될 수 없음을 선언합니다. 그 순간 그 말은 이 세상의 어떠한 것으로 보장할 수 없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말이지만 그 선언은 예수의 신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가장 완전한 역사적 증언입니다. 이를 볼 때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의 초월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무런 유익도 없는 이의 증인이 되어갈 때 그의 쓸모없음을 되새기고 그를 따라 쓸모없어질 때 바로 그때 우리는 진정 예수가 누구인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마르코의 복음서에 나오는 재판 장면은 바로 그가 자기 외에는 누구의 보장도 필요로 하지 않고 어떠한 정당화도 필요로 하지 않는 이 세계가 멈춰서는 지점임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70-71. 마태오는 독자들을 향해 저 감춰진 조화를 보는 법을 익히라고 이 모호한 세계를 그 기저까지 면밀히 보는 법을 익혀 그것이 진실로 뜻하는 바를 이해하는 법을 익히라고 호소합니다. 이러한 마태오의 호소에는 예수가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관계를 맺어온 역사에 최종적으로 일치를 부여하는 존재 그가 지혜 그 자체라는 믿음이 깔려 있습니다.
83.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교리 언어의 목적은 우리를 그리스도 앞에 멈추어 서게 하는 것 달리 말하면 우리 안에 깇이를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철저하게 뒤집어엎을 공간을 창조해나는 것입니다.
86-87. 신앙 언어에 대한 성찰의 목적은 신앙의 언어와 심상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나는 데 있습니다. 마태오의 복음서는 알아보는 능력 곧 지혜안에서 살아가는 데 결정적인 그 능력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있음직하지 않은 것들과 있음직하지 않은 사람들이 연결될 때임을 보여줍니다.
93. 예수의 삶을 통해 드러난 지혜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겪는 고통, 인간들이 겪는 고통, 인간들이 마주한 위협에 노출된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혜안에서 이 지혜를 따라 살기 위해서는 예수와 함께 고통과 위협을 견디고 어떻게든 그가 보여준 자기 비움을 따라야 합니다. 이를 마태오가 그리는 재판 이야기라는 맥락에 놓고 본다면 우리는 신앙 언어를 우리 자신을 방어하거나 타인을 공격하는 무기로 삼는 태도를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95. 지혜는 인간 삶의 연약함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인간에게 건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인정할 때만 자기 스스로를 강하게 여기게 하는 그래서 안정을 주는 모든 거짓 위안을 거부할 때만 생명의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맞출 수 있습니다.
96. 하느님의 지혜를 얻기 위해 첫 번째로 할 일은 “희생당한 이의 관점을 갖는 것입니다. 힘을 추구하는 체제에서 배제된 이들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모든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우리가 힘을 가져야 한다는 권력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심판대에 선 예수를 향해 나아갈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진실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102. 가난한 이들이란 사람들이 기대를 접은 이들 혹은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는 이들 사람들의 시선에서 배제된 이들 사람들이 애써 찾지 않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107. 하느님의 초월은 자신의 목소리를 갖지 못한 이들 세상에 영향을 미칠 힘을 갖지 못한 이들 이 세상에서 자신들이 갖고 있던 최소한의 권리마저 모두 박탈당한 이들에게서 드러난다고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이우는 그들이 윤리적으로 선해서도 아니고 그들이 순교자들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느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 이유는 순전히 그들이 이 사회에서 잉여 인간 취급당하는 찌꺼기 같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운 세상은 누군가의 이익과 복지 그들의 현실을 도외시하지만 하느님은 바로 이 가운데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119. 타자를 타자로 바라보는 것 곧 그들을 나와 동일한 존재로 만들어 나의 기준으로 재단하려는 즉각적인 충동에서 벗어나 그들이 타자임을 알아보는 것은 내가 능숙하게 다룰 수 있다고 믿는 세례의 불완전성을 깨닫고 내가 능숙하게 다룰 수 있다고 믿는 세례의 불완전성을 깨닫고 내가 능숙하게 다룰 수 없다 할지라도 실제 현실의 좀 더 깊은 측면을 담고 있는 세계로 나아가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길입니다.
124. 우리가 하느님의 지혜를 받아들이기 위해 희생당한 이의 관점을 갖추어야 한다면 이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이해할 때 우리가 속한 제도와 체계에서 배제된 이들의 눈으로 이 세상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로워지는 것 그리고 이를 넘어서 내부자도 외부자도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이해를 향해 함께 성장하는 것을 뜻합니다. 대화란 내가 타자로 인해 변화될 수도 있음을 각오하는 것입니다.
127. 루가는 선언합니다. 초월은 실패에 직면한 한 외로운 증인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 무력한 이들에게서 드러난다고 말입니다.
131. 우리가 사용하는 유창한 신앙의 언어들이 하느님의 지혜를 얼마나 가로막는지를 조사하고 더 나아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이 머무르는 제도 체계를 만들면서 누구를 찌꺼기 취급하는지 누구를 배제하는지를 묻습니다. 루가는 더 나아가 우리가 찌꺼기 취급하는 이들 우리가 배제한 이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할 뿐 아니라 우리가 두려워하고 기피하는 그들의 모습이 우리 안에도 있음을 발견하라고 말합니다.
146. 진리 안에 머무는 삶은 이러한 죽음에서 도망치기를 포기하는 것 신앙이 전혀 우리를 위험으로 내몰지 않는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을 뜻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위험은 문자 그대로 박해받을 위험,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위험뿐만 아니라 안전과 안정을 추구하느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하면서도 하느님을 길들이는 삶의 방식을 모두 포기할 위험까지를 포함합니다.
154-155. 예수가 드러나는 곳 그와 함께하는 곳은 위험합니다. 이곳이 우리에게 안정과 안전을 가져다준다고 어디에서도 보장하지 못합니다. 예수가 드러나는 곳에 우리가 머무는 것이 우리의 자유와 관련이 있음을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환대와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 깨닫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요한은 우리에게 자유를 예수가 있는 곳에 함께할 때 뒤따르는 위험을 진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엄격함을 이야기합니다.
155. 그리스도인은 모든 곳을 자기 집처럼 여기는 사람, 동시에 어느 곳도 자기 집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지금 있는 곳, 지금 이 순간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만족을 줄 수 없으며, 이러한 면에서 우리는 집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단순히 편안하다는 이유로 지금 이곳, 이 순간을 붙들려 해서는 안 되며 지금 이곳 이 순간에 제기되는 문제들에 응답하기를 꺼려서도 안 됩니다. 편안하다는 이유로 지금 이곳에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지금 여기를 향해,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은 우리에게 바로 지금, 여기에, 헌신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157. 우리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교회 현실에 몸을 담고 사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해야만 하며, 지금 할 수 있는 단조로운 일들을 하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우리 자신과 비슷한 견해를 가진 이들뿐만 아니라, 우리말을 듣지 않는 이들과도 관계를 맺으며, 함께하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상적인 미래가 아닌 현재를 살라고 지금 이 순간을 정직하게 존중하며 살라고 즉 지금 여기를 집으로 여기며 살라고 요구하십니다.
158, 진리에 머무는 삶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되 끈기 있게 지금 이 순간을 내 집으로 여기는 데서 시작합니다. 관조란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을 정직하게 마주하면서 동시에 그곳에 헌신하며 우리의 뜻 혹은 우리 자신이 만족스러워하는 상에 부합하는 미래의 환영이라는 유혹을 거부함을 뜻합니다. 진리 안에 머무는 삶이란 지금 여기에 있는 것들 곧 우리의 몸 우리가 앉아 있는 의자 우리가 서 있는 장소 지금 우리에게 들리는 목소리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얼굴 이로 인해 발생하는 불만족스러운 면들까지 모두 주의 깊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뜻합니다. 요한이 그리는 세계는 그 자체로 그리고 가치의 원천으로서 언제나 다양한 종루의 비진리와 엮여 있습니다. 이 세계는 그 자체로 자신을 창조자와 대척점에 있는 무언가로 정의합니다.
162- 163 이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지금 여기 우리가 있는 곳에 온전히 있는 것입니다. 관습적으로 이해하는 틀을 내려놓고 지금 이 순간에 닻을 내리면 이곳은 하느님을 만나는 지점이 됩니다. 바로 이때 우리는 영역과 방어 기제들을 넘어선 곳으로 들어가며 진리의 환대를 받습니다.
166-168. 하느님의 존재가 내어주는 환대는 예수 그가 기도하는 하느님 그가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성령이 빚어내는 복잡한 상호관계로 드러나며 이를 통해 우리는 환대받을 뿐 아니라 누군가를 환대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이제 이 세계에서 우리가 머무는 공간은 우리가 싸워서 쟁취해야 할 영역이 아니라 세계와 타자를 초대하는 집이 됩니다. 심판대에 선 예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며 우리는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마르코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증인으로 홀로 서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태오는 우리자신을 소외시키는 전문 지식 종교성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루가는 암묵적으로 만들어 놓은 문밖에 있는 이들의 소리를 들으라고 그리고 그들과 함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우리에게 우리가 속할 왕ㅇ국을 결정해야 할 뿐 아니라 어떤 세계에서 살지를 결정해야 한다고 마랍니다.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진실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친숙한 세계와 대립하는 윤리적 세계의 중심을 이루는 이입니다. 그는 진리가 머무르는 공간입니다. 우리가 예수에 대해 아무리 많이 안다 할지라도 그가 누구인지에 대한 판결은 우리가 기꺼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 앞에 서려 할 때 그와 함께 심판대에 서고자 할 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169. 심판대에 선 예수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신앙은 삶의 중심을 우리 자신에게서 예수에게로 옮기기를 요구합니다. 예수가 선 자리는 그곳은 이 세계의 특정한 곳에 있지 않습니다. 그곳은 모든 곳에 있으며 동시에 어느 곳에도 있지 않습니다. 또한 어디에도 갇히지 않고 무엇과도 경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고 예수가 선 그 자리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과 경쟁을 위협합니다.
187. 우리가 겪는 고통은 진실하게 대하면서도 자신을 피해자 희생자라는 위치에만 높으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195-196 두려움은 우리의 일상을 조건지우지만 우리는 이 일상이라는 무대에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힘의 주권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는 기예란 곧 두려움 없이 살아가는 방법을 뜻합니다. 내면에서 넘쳐 흐르는 확신을 따라 우리가 받은 것을 육화하는 것, 곧 이를 몸으로, 목소리로 만드는 것, 우리가 선 자리에서 이루는 것입니다.
197. 순교란 이 세계의 권위에 바탕을 둔 특정 질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빚으신 대로의 세계에 자신이 속해 있으며 속하겠다는 최후의 선언입니다. 이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202. 우리가 할 일은 믿음으로 일상을 살아내는 기예, 곧 도망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담담한 일상의 언어로 살아내는 것뿐입니다.
219. 하느님은 어떤 극한의 상황 아무런 답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모습은 우리가 기대했던 그분 우리가 이해하는 그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231. 마르코의 복음서가 주목하는 것은 종교가 가져다주는 위안입니다. 마르코는 하느님이 결국에는 우리가 세운 이론과 기대에 따라 움직이리라는 오만함, 그분의 초월이 실제로는 인간이 세운 우선순위와 그들이 이해하는 희망과 욕망을 건드리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심판대에 세웁니다. 마태오가 이야기하려는 바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하느님의 지혜가 현실에 가져다주는 충격을 거부한 채 자신의 지혜에 기대 위안을 얻으려는 성향, 점점 더 하느님에게서 벗어나 종교적 언어와 종교적 행동을 통달하여 피아식별을 하려는 경향이 심판대에 서야 할 진정한 피고인이라고 말합니다. 루가는 낯선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막은 채, 누구의 목소리가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를 오만하게 재단하며 스스로를 '내부인'으로 여김으로써 안정과 위안을 얻으려는 태도를 취조합니다. 마지막으로 요한은 이러한 논의들을 더 확장해 우리의 의지와 망상으로 세워진 세계에 맞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세계, 우리가 집으로 여겨 이와 함께 그 안에 머물도록 부름받은 세계를 제시합니다. 이로써 우리가 실제로 있는 세계에 있지 않으려는 경향, 우리가 다스리는 세계에 머물러 위안을 얻는 경향을 심판대에 세웁니다.
232. 엑스페리멘툼 크루시스. - 십자가의 경험 / 십자가의 시험 / 십자가의 실험 곧 예수의 십자가에 비추어 우리의 자기 이해를 시험하고 검증함을 뜻합니다.
234. 교회가 스스로 신앙의 대상이 되지 ㅇ낳으려고 끊임없이 분투할 때 예수에 대한 재판은 지금 여기의 사건이 됩니다. 평화라 여기는 것을 위해 예수를 배반하는 일은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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