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레퀴엠

huuka 2017. 10. 4. 14:57

낯선 길을 달리며 둘은 웃었다. "우리가 언제 이 길을 달려보겠어?" 그의 나지막 목소리가 귓가에 고른 소리로 퍼졌다. 그 여자는 이렇게 그 남자와 무작정 나서는 걸음이 싫지 않았다.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사진찍기에 풋내나는 설레임이 그 여자를 들뜨게 한 까닭인지도 모른다. 꽤나 높다고 느꼈을 때 눈앞에 돌아가는 풍력발전기를 카메라에 담았다. 잔뜩 흐린 폼새가 가을이 오기도 전에 한기를 느끼게 했다. 이 산넘어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 여자와 그 남자는 산을 돌았다. 산새가 깊다. 전원주택 분양이라는 현수막이 보였다. 말 수를 잃은 그 여자는 이상한 기운을 느낀다. 전원주택의 안락함, 포금함보다 짙게 깔린 죽음의 냄새를 맡는다. 이 동네 이상하다. 그 남자는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일까? 진짜 옛날집이라며 내려서 사진을 찍는다. 싫다. 이곳이 그 여자는 싫었다. 괴괴한 그림자에 그 여자는 숨을 쉴 수 없을 것만 같다.


모두가 명절맞으러 떠난 오늘. 불현듯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언제부터였을까? 그 여자에게 죽음은 먼 곳의 일이 아니였다. 오늘처럼 그렇게 먼 길을 떠나고 싶은 날은. 스스로를 학대함으로 더욱 죽음의 길 모퉁이에 버티고 서 있고 싶은지도 모른다. 철저하게 외롭게 철저하게 혼자. 그렇게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싶은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그 남자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다는 것. 신의 불공평 앞에 자신의 의지로 신이 부여한 생명에 불안을 가하는 교만이 그 여자가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신 앞에서의 항거일지도 모른다. 그 여자로 인해 그 남자는 자신이 사랑한 것들을 잃었다. 그 남자가 사랑하고 그 남자가 잃은 것은 처음부터 그 여자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다. 신의 불공평이다.그 여자의 고통의 근원이다.


그 남자는 외롭게 자랐다. 항상 따뜻함이 그리웠다. 그래서 L의 부모님과 L의 남매가 좋았다. 그 남자는 유독 L의 여동생들과 사이가 좋았다. L로 인해 시골생활을 결정했을 때에도 L의 남동생과 집을 개조했다. 그렇게 L이 장녀였던 까닭에 그 짐을 함께 지며, 가난. 시골에서의 유년시절등의 공통분모가 L과 그 남자를 더욱 결속시켰는지도 모른다.  그 여자로서는 결코 공유할 수 없는, 아니 그 여자가 L을 이길 수 없는 부분이다. 영원히 L의 흔적속에 그 여자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그 남자를 바라보아야하는 자신을 예측한다.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그 남자를 외롭게 했으니 그 여자가 겪어야 하는 고통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남자가 사랑하는 것을 잃게 만들었으니 그 여자가 아프고 고통스러운것이 다행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 여자는 자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 놓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 남자에게 모든 것을 돌려주고 싶다. 아니 그 남자에게 L을 돌려주고 싶다. 자신의 남은 생명으로 L의 생명을 잇대어 놓고 싶은지도 모른다. 귀머거리 신은 여전히 그 여자의 기도따위는 듣지 않는다. 그래서 스스로 죽음에 대한 열망이 더욱 깊어지는 까닭이겠지.


그 여자는 어릴 적 부터 죽음을 생각했다. 백합꽃의 짙은 향기가 사람을 죽게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무렵부터 백합꽃을 방 안 가득 채워 공주님처럼 죽어가는 자신을 상상했다. 하지만 짙은 향기속에 맞는 죽음이 공주님처럼 우아한 것이 아니라 고통속에 벽면을 손톱으로 끍다 죽는다는 것을 안 다음 더이상 백합꽃 사이의 죽음은 꿈꾸지 않게 되었다. 단 번에, 고통 없이, 추하지 않게 죽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어느날 참치 캔에 손을 잘렸다. 아니 오른손이 캔 뚜껑으로 왼손을 지긋이 눌렀을 때 살을 파고 드는 묵직한 그 느낌은 묘한 자유를 묘한 쾌감을 느끼게 했다. 이거로구나.. 


매일매일이 살아남는 일이었고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지는 않았다. 그 여자가 잠시 살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가지게 된 것은 그 남자를 만나고 나서 였다. 하지만 그 여자는 이내 더 깊은 절망 더 깊은 외롬에 빠졌다. 살아 남은 것이 고통임이 그를 사랑함으로 더 절감하게 되었다. 자신의 하찮음과 자신의 무능을 마음껏 비웃고 싶었다. 그 남자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는 껍데기와 같은 자신과.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그 남자의 마음앞에 철저히 깊은 고독과 무능을 곱씹게 된 것은 그녀의 탓이 아니라 불공평한 신의 탓이었다.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멍소리  (0) 2017.12.10
  (0) 2017.12.08
달빛도 때로는 잔인하다.  (0) 2017.11.23
무화과  (0) 2017.09.30
202호.  (2) 2017.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