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너를 알고 사랑을 알고
종이학 슬픈 꿈을 알게 되었네
어느 날 나의 손에 주었던
키 작은 종이학 한 마리
천 번을 접어야만 학이 되는 사연을
못다했던 우리들의 사랑노래가
외로운 이밤도 저 하늘 별 되어
아픈 내 가슴에 맺힌다. 전영록 "종이학"
"종이학" 접기가 유행했던 때가 있었다. 껌종이로 만들던 것이 어느 때부터 학종이가 나오게 되었고, 좋아하는 아이돌을 위해, 좋아하는 그 누군가를 위해 밤을 세워 천 마리의 학을 접었다. 아마도 전영록이라는 가수의 '종이학'이라는 가요가 유행하면서 바람을 타기 시작했다. 또 사랑하는 이를 위해 천 마리의 학을 접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우리의 정서와 맞아 떨어졌다. 나도 누군가를 위해 학을 접었지만 끝내 건네지는 못했다. 그 뒤에 유행했던 "학알"접기,"별"만들기도 누군가를 위해 접었지만 유리병 가득 채워놓고 전하지는 못했다. 왜 그랬을까? 용기가 없었다기 보다 어쩌면 천 마리, 천 개의 알, 천 개의 별을 미처 다 접지 못한 까닭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쨋든 전하지 못한 종이학. 학알. 별은 차곡차곡 유리병 안에 담겨서 피아노 위를 장식하는 장식품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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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모으고 소원을 담아 종이를 접는 것은 참 낭만적인 일이다. 한 마리의 학을 접기 위해서 천 번까지는 아닐지라도 여러번 종이를 접었다. 폈다하게 된다. 그 누군가를 생각하며 설렘과 두려움. 간절함과 불안감이 접었다 폈다 하는 손끝에 아프게 맺혀 있었을 듯하다. 사랑은 가슴에서 씨를 맺어 손끝에서 피어난다. 마음 가득한 정성은 언제나 손의 수고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감추인 씨앗은 알 수 없지만 손에서 피어난 수고는 드러나는 법이니까 말이다. 아픈 손끝의 수고는 받는 이에게 감동과 무언의 거절하지 못할 압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천 마리의 학은 사랑고백의 도구가 되었는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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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를 접듯 우리는 때로 "마음을 접는다." 하지만 이때의 의미는 결코 긍정적인 사랑의 언어가 아니다. 참고 인내함. 포기를 뜻한다. 마음을 접고 접어 이제는 더이상 접을 모서리가 없어질 때, 그 뒤의 결과는 무엇이 될까? 그렇다면 그 마음은 한 마리의 '학'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한 마리의 학이 되어 처음의 그 설레임과 그 사랑의 정열을 회복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마음을 접을 때, 참고 인내함. 포기가 상대를 향한 잣대가 아니라 나의 모난 부분을 접고 나의 불화한 것을 접어보자. 비록 그것을 접는 손끝은 아프고 시릴지라도 말이다. 마음을 접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사랑한다는 것이고, 모든 모서리를 다 접어 이제는 더 이상 접을 모서리가 없다는 것은 둥글어졌다는 것이니 남은 것은 결국 나의 문제, 내 마음의 모서리인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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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아이들이 종이학이나 별을 접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이런 수고로움은 어리석은 일이고 귀찮은 일이다. 이런 것으로 감동하는 세대는 이미 구닥다리 노친네 세대다. 그럼에도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지금 너희들 세대보다 우리는 "낭만"적이었다고 말이다. 조금은 더 순수한 사랑에 가까웠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