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빠진 컵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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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애착을 느끼는 객관물은 사람이나 동물에 한정되지 않는다. 작은 컵 하나. 책 갈피 사이의 네잎 클로버.낡은 구두굽. 다 헤어진 가방. 그것들에 저마다 시간과 공간의 이야기가 영글어 있다. 커피를 내려 마시려 잔을 들었을 때 찻잔입술에 떨어져 나간 부분이 보였다. 순간 버려야 하나...커피를 다른 잔에 옮겨 담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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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괜찮아요."
어느선가 나즈막한 목소리가 들린듯 하다. 내려다보니 컵안 가득 담긴 커피는 안정감 있게 고른 수증기를 내보내고 있다. 자기 역할은 아직 다하고 있다. 그 다음은 마시는 사람의 몫. 줄리아로버츠처럼 큰 입을 가진 나이지만 조심만 하면 잘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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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컵은 새물결에서 '지렁이기도'책을 출간하면서 받은 컵인듯하다. 꽤나 논란을 일으켰던 책. 이렇든 저렇든 자신의 기도생활에 대하여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면 책으로서의 몫은 다한 셈 아닐까? 사실 난 그 책보다 컵이 좋았지만.^^. 컵이 제법 두껍게 만들어져서 (같은 용량의 스*벅*잔은 이것보다 얇고 키가 작다.) 오랫동안 따뜻함이 유지되었고, 제법 넉넉한 양의 커피를 즐기는 나를 만족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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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흐리다.
천고마비.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그 가을이건만 높고 파란 가을하늘은 기대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초록물 빠진 나무에 든 붉은 물은 환경은 변해도 가을의 그 몫은 하고 있다. 이 빠진 컵. 아직은 자신의 몫은 할 수 있지만 언제 버려질 지 모르는 존재. 실하게 감당할 수 있다고 나 혼자 온 힘을 다해 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빠진 컵이 어쩐지 나랑 닮았다. 그래서 일까? 손끝으로 이 빠진 부분을 문질러 본다. 까츨거림. 가슴이 서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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