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와 영성이야기> 엔도 슈사쿠. 흔적과 아픔의 문학. 김승철. 비아토르.
#그와 나.
엔도 슈사쿠, 흔적과 아픔의 문학(#김승철_비아토르)은 데칼로그(포이에마, 김용규) 이후 가장 애착을 가지고 열심으로 읽어낸 책이다. 일본에 대한 애착이 엔도에게 집착하게 한 것인지, 그의 작품 침묵을 통해 해답을 찾으려 한 나의 의문점 "신은 왜 침묵하고 있는가?"에 대한 연장선이었는지도 모른다. 책이 도착했을 때 그이가 먼저 책을 잡았다. 마음이 상했다. 줄 그어 놓은 책을 읽는 것을 난 힘들어한다. 그래서 가난했던 신학생시절에도 도서관에서 빌려 읽지 않았고 빚을 내어가며 책을 구입해서 읽었다. 그이가 100페이지 가까이 읽고 책 소개 글을 올리자, 나는 책을 뺏었다. 빨리 읽고 돌려 주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나를 부담스럽게 했지만 나는 한줄 한줄 줄을 그어 읽으며 곱씹었다. 좋았다. 아마도 나의 의식체계에는 한국인 아버지보다 일본인인 엄마의 피가 더 강하게 흐르고 있나 보다.엔도를 알아가는 것, 엔도를 통해 일본을 이해하는 것, 엔도를 통해 일본기독교를 바라보는 것, 그 모든 것을 넘어서 나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 되었다. 엔도의 "침묵"이 많은 이들에게 오독(誤讀)되었듯 나라는 사람 역시 그 오독(誤讀)으로부터 조금은 이해받을 수 있다는 위로를 주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아팠고, 나는 행복했다.
#침묵이 아니라 엔도다.
이 책은 엔도 슈사쿠의 '침묵'만을 소개하는 글이 아니다. 작가 엔도의 평전(評傳)이라 할 만큼 그의 작품의 전반적인 세계를 다루고 있으며 '침묵'이라는 작품이 나오게 된 그의 작품들을 통해 그의 사상 체계를 소개하는 책이다. 단순히 왜 "신은 침묵하고 계신가?" 아니다. "신은 침묵하지 않고 항상 말씀하고 계시다." 이렇게 단답형 답을 적듯 결론 내릴 수 있는 책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 책은 엔도를 통해 일본이라는 토양을 이해하고, 엔도를 통해 일본의 기독교를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안경을 가질 수 있게 해 준다. 나는 왜 하나의 안경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성급한 글읽기로 일본선교의 무가치성이나 일본선교의 열매없음을 당위시하는 오독(誤讀)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 책은 책의 제목처럼 엔도에게 남겨진 어머니와 그. 그의 의식속에 남겨진 기독교의 흔적과 고뇌의 아픔으로 탄생한 문학작품 하나하나를 깊이 있게 연구한 책이다. <기독교 사상>에 만 2년에 걸쳐 연재한 원고를 부분적으로 수정, 보완한 결과물로 우리의 손에 들려진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엔도만큼 신앙에 대하여 기독교에 대하여 고민한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동양적 사고방식을 가진 그에게 어머니 손에 이끌려 받게 된 "세례"는 몸에 맞지 않는 양복. 이질적인 그 무엇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몸에 맞지 않는 양복을 벗어버리지 않고 어머니의 유산으로 고뇌하며 성화의 길로 나아간 것이다. 그것이 참 고맙다. 쉽지 않은 그 길에서 남긴 흔적을 통하여 일본을, 일본속 기독교를 맛볼 수 있으며 인간의 근원적 고뇌, 내 속의 문제의식까지 발견하는 기쁨이 있지 아니한가?
#엔도의 작품세계
그의 작품세계는 크게 3기로 나누어 설명될 수 있다.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엔도는 자신을 작품을 통해 일본인으로서 기독교를 수용하고 이해하고자 했다. 그는 일본적 - 범신적 풍토를 전면에 부각시킨 기독교와, 인간의 죄의식 이해를 바다(늪.강,어머니)라는 메타포를 이용하여 설명한다. 그 바다는 서구 기독교의 이질성을 빨아들여 동양화시키는 세계임을 주제화 한 것이다.(p183). 그가 생각하는 죄의식은 타인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무감각과 무관심이며 그가 생각하는 신앙은 그리스도는 죄악 깊은 인간을 끝없이 용서하는 약자의 하나님. 배교할 수밖에 없는 연약함을 지닌 그들과 함께 동반자로
있어주는 일본적 -모성적인 어머니의 종교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성서의 기적담보다 위로담에 주목하였고 그는 작품속에서 부족함. 무력함이 드러나는 인물들을 통해 동반자로서의 예수의 초월성을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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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초월 거리감의 극복
일본인으로 엔도는 서양종교인 기독교를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는 것에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감을 그는 느꼈다. 그는 3번에 걸쳐 작품의 변용단계를 통하여 그 거리감을 좁혀나가고 있었다. 백색인, 황색인을 통하여 표현된 거리감은 이후 작품들을 통해 거리감의 객관화와 그것은 '내가 실감하는 예수'를 붙잡길 원하는 의식의 승화로 그 의식은 작품속에서 서구 기독교의 일본적 성화라는 차원에서 다루어졌다. 엔도 문학의 근본 모티프가 된 '거리감'은 그에게 있어 객관적이고 방관자적인 공간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과 존재의 내면에서의 갈등으로 심각하게 받아 들여졌는데 그럴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배교자의 존재였다. 즉 우리가 익히 읽어 알고 있는 "침묵"에서 그려진 배교자들이 그의 작품에서 거리감을 좁혀가는 아교역할을 한 것이다.엔도는 "침묵"속 후미에를 밟는 로드리고를 통해서 일본적 모성적 그리스도를 탄생시켰고,"깊은 강"에서 갠지스강의 세례를 통하여 일본적 모성적 그리스도마저 무화시킴으로 초월과 일상의 벽을 무너뜨림과 동시에 서구 기독교와 동양적 범신적 혈액사이를 가로지르던 거리감마져 사라지게 해 버렸다.(p458-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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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적 침묵
엔도는 침묵하고 있는 신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침묵'은 신의 침묵이 아니라 신은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쓰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다르게 와 닿았을까?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번째는 제목이 주는 인상이다. (처음 엔도가 정한 제목은 "양지의 냄새"였다.) 두번째 우리의 삶속에서 말씀하시는 신의 모습을 숨겨 놓은 곳이 우리나라에서 번역 누락된 <관리인의 일기>이기 때문이다. <관리인의 일기>는 침묵에 덧붙여진 부록이 아니라 최종적 결론이다. 이 일기는 배교한 이들이 살아남은 자로서 겪었던 고통과 굴욕과 회한을 곱씹으면서도 처절하게 자신의 신앙을 지켜간 것을 알게 해준다. 신은 그들의 동반자가 되었고 그런 약자들과의 연대의식을 통해 표방된다.'관리인의 일기'의 존재조차 몰랐으니 어찌 침묵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을까?
..."<침묵>은 신의 침묵이 아니라 신은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쓰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 그리고 신이 말씀하신다는 것은 사람들의 인생이 그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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