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

웅크린 말들 / 이문영 / 후마니타스

huuka 2018. 5. 12. 17:57

웅크린 말들  / 이문영 / 후마니타스


<참 미안합니다.>


그 여자아이의 나이는 14정월생이라 그런지 또래치고는 작다깡마른 몸조그만 얼굴에 커다란 사팔뜨기 눈이 도드라져 보인다유난히 흰 피부 때문인지 쓰러질 듯 창백하다난 그 여자아이의 눈을 보는 순간 불안에 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아니 그것은 불안을 넘어선 공포다이 낯익음은 타인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앞으로 자신의 삶이 어떻게 될지이런 낯선 환경 속에서 자기편이 되어줄 사람이 누구인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 생각해도 알 수 없는 막막함그 작은 몸이 뿜어내는 긴장감에 오히려 내가 숨이 막혀버릴 듯하다김 순분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그 여자 아이의 이름은 김 순분이다언니랑 같은 나이나와는 두 살차이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우리 집 가정부로 들어왔다아버지는 언니랑 오빠 나에게 오늘부터 집안일을 도울 사람으로 소개하고 언니친구 동생으로 한 가족이라며 잘 지내라고 했다.어린 나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김 순분을 가족으로 생각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

그 여자 아이는 식당 방에서 기거하면서 우리들보다 빨리 일어나 밥을 도왔고우리가 학교를 가면 우리들 방을 청소하고 널부러진 빨래를 했다우리 가족이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기 시작하면 간단한 뒷정리를 하고 식탁 한끝에서 밥을 먹고가족들이 식사를 마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설거지 준비를 했다그렇지만 14한참 놀고 싶고 어쩌면 학교를 가고 싶은 나이 아니었을까사춘기가 시작되고 예쁜 것을 보면 갖고 싶고예쁜 옷을 입고 싶은 그런 나이그런 까닭일까때때로 언니의 신경질적인 고자질과 순분이의 눈물을 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가족처럼 생각하는 것과 가족의 차이를 순분이를 나무라는 엄마의 말에서 나는 깨달아가게 되었다궁금했다순분이는 왜 학교를 가지 않고 우리 집에서 일을 하는지... 그녀의 아버지가 알콜중독자라서 술만 마시면 그녀를 때렸다고 했다엄마는 입 하나라도 덜기 위해 순분이를 식모로 우리 집에 보냈다그랬다그 시절에는 누구나 다 배불리 먹고 하얀 쌀밥과 고기를 먹었던 것은 아니다누구나 다 학교를 다녔던 것도 아니었다순분이 역시 우리 집이 더 좋다고 했다과연 그랬을까하지만 그때는 그 말을 여과없이 믿었다맞고 사는 것 보다는 편하겠지우리 집에서는 먹을 수 있으니까순분이의 눈물을 자주 보았지만 그렇게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

이문영의 <웅크린 말들>이라는 책을 아프게 읽었다말해지지 않는 말들의 한()국어 사전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사실 이 책의 내용을 알고 읽게 된 것은 아니다. ‘잊혀 가는 우리 한국어인가?’ 하는 착각으로 선택해서 어쩌면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운명이고 필연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해야겠다웅크리다는 말은 (사람이나 짐승이 몸이나 몸의 일부를)몸시 우그려 작게 하다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는다언어의 웅크림표현되기를 거부하는 언어아니 표현될 수 없어서 웅크린 그 말 대신 은어나 비유상징으로밖에 사용될 수 없는 말이 있었다그 단어는 단순한 소리기호가 아닌 삶이며 눈물이며 고통이며 죽음이었다같은 한국어(韓國語)이지만 한()국어가 될 수밖에 없는 말들을 빼곡이 적어나간다.

.

이문영은 들어가며 이렇게 적고 있다.

  “두 세계를 구성하는 두 언어가 있다언어는 거울이면서 거짓이다삶을 비추기도 하지만 삶을 비틀기도 한다삶과 조응하기도 하지만 삶을 조롱하기도 한다()국어가 언어의 표준을 자임할 때 표준에서 배제된 언어는 한()국어가 된다()국이 국민의 표준을 지정할 때 표준에 끼지 못한 사람은 한()국에 산다.” p7

요즘 말로 라임이 맞아 떨어지는 언어유희다같은 한이라는 글자를 다른 한자 한()과 한()을 통해 내용을 설명한다맞다같은 나라동일한 시대를 살아가지만 다른 세상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차마 소리 내어 말하지 못했던 내 형제내 누이아버지 어머니들의 삶하부구조가 없이 상부구조가 있을 수 없듯 하부구조속의 그들의 삶이 없이 상부구조의 삶은 존재할 수 없다아니 그들의 삶을 발판으로 우리들은 서 있다.

 소리 잃은 검은 기침석탄 집이 오는 과정시멘트 첨단의 풍경굴뚝 수리되지 않는 노동서비스 / ......나와 그대의 이야기백골 / ..........................가난한 꿈의 연표밀 지구의 침몰 세월 

총 17가지의 이야기와 그 바탕이 된 사건이 첨부되어 있다나는 이들을 이해하지 못했고이들을 알지 못했다하지만 그들은 나와 무관하지 않다어쩌면 그들의 땀으로 우리는 먹었고그들의 눈물로 우리는 배불렀는지도 모른다.

.

어느 날 집에 아버지 손님들이 오셨다친구 분은 너가 누구냐” 물으셨고 오빠는 돌아가며 소개했다하지만 순분이가 빠졌다나는 그분께 우리 언니라고 소개했고 오빠는 식모라고 고쳤다순분이는 철저하게 구분되어지는 존재였다그녀의 손을 통해 밥을 먹고그녀의 손을 통해 우리는 깨끗한 방에서 생활했지만 그녀는 웅크린 삶소외된 삶을 살아야했다순분이는 92년 결혼을 했다결혼상대자는 꽤 나이가 많은 소아마비를 앓는 장애인이었지만 먹고 사는 것은 걱정 없는 좋은 자리라고 했다과연 그랬을까꽃다운 24남의 집 더부살이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조금은 살아보고 싶지 않았을까자기보다 10살넘어 많은 남자의 아내로 또다른 삶에 묶이게 된 그녀는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충분히 괜찮은 행복한 삶이라 말할 수 있을까그녀의 웨딩드레스의 눈부심은 그녀가 남몰래 흘린 눈물의 반짝임이었을까또다시 빚어갈 진주의 아픔이었을까?

.

태어나면서부터 구분되어진 삶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삶의 과정과 길이 결정되어버리는 세상아무리 노력해도 그 노력의 열매를 누릴 수 없는 구조적 문제들나에게는 심각한 것이 되지 못했다학원에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침을 튀기며 가르칠 때도 그들의 삶과 그들의 인생은 철저히 타자화 된 작품 속 세계였다내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 구분된 삶을 살아가는 마른 눈이다인생 새옹지마라 했던가?주민센터에서 차상위가정’ 적합판정을 받았다그 옛날의 화려함은 찾아 볼 길 없다밤이 오면 하루를 살아내었다는 안도감을 누리고 아침 해가 창문에 드리우면 하루를 살아내어야 하는 무게에 괴로워한다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삶밑바닥 인생고개를 들수 없는 잔뜩 웅크린 삶그럼에도 온실 속에서 자라난 내 몸은 노동의 현장에 들어서지도 못한다마치 일 할 수 있는 모든 근육과 골격들이 기능을 상실한 퇴화된 고깃덩어리그들의 땀과 눈물로 나는 먹고 마셨지만 내 땀과 눈물로 그 누구도아니 나 자신조차 살아가게 할 수 없다이런 나라서 그들의 삶을 조금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일까내 삶이 바닥을 치기에 이문영의 글들이 나에게 박힐 수 있었던 것일까? 오늘에서야 나는 잊고 살았던 김 순분의 부서지는 웃음을 기억너머에서 소환한다. 그리고 비겁하지 않은 손내밈으로 이 땅 어딘가에서 그 작은 손으로 최선의 삶을 일구어갈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말을 건네고 싶다.



'지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엔도 슈사쿠의 동물기  (0) 2018.07.25
회복적 생활교육  (0) 2018.05.25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0) 2018.04.29
시인의 밥상 / 공지영 / 한겨레  (0) 2018.03.29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0) 2018.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