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일 정신없이 바빳다. 분주함은 애써 주워담은 마음들을 허무는 파괴자가 된다. 오랫동안 끊었던 수면제를 먹었다. 기억소실을 경험한 이후 다신 먹지않으리라 다짐했었는데 또 허물어지는 나 자신을 본다. 한 없이 가라앉는 나를 다독여 메트로폴리탄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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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부리지 않고 오늘은 몇몇 작품만 지긋이 바라보다 와야겠다는 생각에 느긋이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이 많이 찾는 고흐나 모네가 아닌 다른 그림을 보아야겠다는 생각에 사람이 드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살바도르 달리, 십자가의 처형이다.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는데 그림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정확한 이름은 "초입방체 십자가의 처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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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원 입체도형의 전개도위에 걸려있는 예수. 설에 의하면 이 예수조차도 그의 아내 갈라로 중성화되어 표현되어 있다한다. 대속의 피한방울없이, 못 자욱이 있어야 하는 손바닥마저도 야구공을 손을 진듯 말려있다. 성스러움과는 너무나 먼 이 초 현실주의 그림앞에 나는 서 있다. 마치 그림안에서 우주공간에 떠 있는 예수를 바라보는 유다처럼. 십자가 아래에 있어야할 막달라 마리아나 다른 이들의 흔적은 찾아볼 길 없이 배신자에게 입혔던 노란 옷을 든 유다만 남겨져 있다. 온 우주안에 오직 판 자와 팔린 자만이 캔버스에 남겨져 있는 것이다. 이 불경이 주는 섬뜩함에 오히려 거룩을 맛보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미치광인것인가. 어느새 나는 유다가 되어 공중에 떠 있는 예수를 본다. 흔히 짓눌러진 눈일지라도 실눈을 뜨고 인류에 대한 연민이 가득담긴 그의 눈은 볼 수 없다. 그의 고개는 옆으로 완전히 젖혀져 철저히 외면한다. 내가 외면당한 것인가? 밀려드는 두려움에 나는 일어선다. "주여 나를 외면치 마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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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을 찾았다. 미술관안에 정원과 연못까지 마련되어 있는 중국관에 비하면 거의 쪽방사이즈밖에 되지 않는 한국관에서 그리운 이를 만났다. 박수근이다. 말간 얼굴의 백자보다도 더 설렌다. 거친 화강암느낌에 투박하니 긁어 낸 느낌의 <나무와 두 여인> 뉴욕의 한 가운데서 박수근의 그림을 만나게 될 줄이야. 박수근의 고향이 양구였다지. 그의 화풍인지 알길 없지만 흐릿한 형태에 아스라히 떠오르는 얼굴과 그 시간이 겹쳐보인다. 기억이란게 꼬리에 꼬리는 무는 것이라. 박수근이고 박수근은 양구고 우리는 양구에 머물렀었더랬지. 기억하고싶은 시간은 아니지만 우린 분명 그곳에 그시간에 있었지. 좁은 한국관안에 놓인 장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그림을 보고 있자니 내나라 것이 주는 소박한 다정함이 마음을 어루만져온다. 모네나 고흐 그 누구에게서도 느낄수 없는 내 고국의 흙냄새. 척박하고도 지난한 가난이 묻어나는 삶의 자리가 한없이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걸음수를 줄였지만 다리통증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심해진 하지정맥과 퇴행성관절염은 삶을 고달프게 한다. 그럼에도 얼마나 다행인가? 가까운 곳에 미술관이 있고 박수근을 통해 내것의 정서를 느낄수 있었으니 충분한 위로가 된다는 것. 작은 것에 행복을 느끼고 이곳에 있게하신 그분의 뜻은 알 길 없지만 그에게로 조금씩 나아갈 뿐.
https://youtu.be/pvtDpmTvBAM?si=lV7EgxCw3pzAhSw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