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공원은 더위에 지친 이들의 쉼터가 된다.직장인들에게는 점심도시락을 펼칠 간이 테이블이 되고 이렇듯 저자와의 만남의 자리도 마련된다. 이것이 뉴욕의 매력인 것일까. 클래식과 테크놀로지가 어울어진 이곳에서 나는 섞이지도 분리되지도 못할 체 갈팡질팡 망설이는 마음이 된다.
나는 여전히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자신을 잃어버릴 때가 있고, 속절없는 그리움에 무너져 내릴 때가 있다. 어쩌면 불안과 그림움은 나의 삶을 이끌고 가는 동력원이 되어버린지도 모른다. 행여 이 불안과 그리움이 고갈되어버릴까 오히려 두려운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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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곳에서부터 누군가 왜 글을 쓰지 않냐고, 다음 책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기쁨보다는 가시박힌 채찍처럼 느껴져 되려 아팠다. 그때 그랬다면 조금은 다른 인생을 살았을까하는 가정따위는 더이상 하지 않는다. 다만 그안에서 변화지 않는 고유한 나자신의 것이 무엇인가를 골몰할 때 어쩔수 없는 쓰는 인간이라는 반갑지 않는 정의에 다다르게 된다. 그래서 그러한 것일까? 생을 위협하는 우울과 놓치못하는 그림움을 쓰는 행위의 자양분으로 키워나가고 있는 자신을 마주한다. 우울해서 불안해서 살아있고, 그리워서 밤의 시간을 걷게 되는 지금이야말로 가장 나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말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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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는다는 것에 이렇게 둔한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잊지못하는 시간의 강도가 생각보다 컷다는 것을 어리석게 깨닫게 된다.그 누군가에게는 간단히 걷어낼 지워도 될 시간이었는지는 알길 없지만 나에게는 그러지 못했다는 안타까움보다 이제는 보듬고 싶은 시간이 되어 한없이 그립다. 대상에 대한 그리움이라기 보다 그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 더 적확한 말일까? 모르겠다. 그것에 대해서는 좀더 시간이 흐른뒤에나 알 수 있겠지.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젊었고, 철없고, 뜨거웠고, 순수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