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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가 갖는 의미.

huuka 2024. 4. 5. 09:00

15시간의 비행의 피곤도 몸의 리듬을 바꾸어 놓지는 못하나보다. 곤한 몸에 비하여 정신만은 맑아 딸이 출근하자 간단히 집 정리를 하고 밖을 나섰다. 읽고 싶었던 책이 절판이라 딸애집 근처 작은 도서관에서 대출을 했다. 주민센터 3층에 위치한 한칸짜리의 작은 도서관. 사서인 것인지 공무원인지 알길 없지만 자신이 해야하는 업무조차 파악하지 못한 어설픔이 느껴지는 것은 느려터진 미국행정시스템과는 또다른 반감을 갖게 한다.업무에 찌들린 권태라고 해야할까. 그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단지 그 자리를 단지 그 시간을 떼우고 있는 느낌을 지울수 없게 한다. 델핀 드 비강의 "지하의 시간들"을 읽고 싶어서 책을 찾으니 절판으로 나타났다. 서울내 도서관 단 3권이 비치되어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작은 도서관에 이 책이 있었던 것일까? 서지정보를 찾아가지 않았다면 있는 책도 빌리지 못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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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빌려 점심을 먹기위해 영등포 지하상가를 걷다 알라딘을 발견했다. 알라딘이다. 알라딘. 내가 좋아하는 책이 있고, 고양이가 있고, 그리고 그와의 시간이 있는 곳. 이곳은 그때와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 멈춰진 시간이다. 계단벽을 따라 그려진 작가들의 얼굴. 내가 사랑한 까뮈의 얼굴과 함께 셀피한장을 남겼다. 입구에 놓여있는 여러가지 굿즈들. 하나하나 살피며 고양이 모양을 찾았다. 불현듯 누군가의 목소리가 기억을 타고 흐른다. 누군가의 다정이 작은 고양이 캐릭터하나에 남아있다. 어디가서든 내가 함께이든 아니든, 오프라인이든 아니든 그의 다정은 작은 고양이 굿즈하나에 담겨 있었다. 서점에 왔으니 책을 살펴보아야하는데 혼자만의 덩그런 시간은 나에게 무의미로 다가온다. 활자들이 흩날린다. 나의 기억의 조각들도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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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의 하늘은 흐리기만하다. 드문드문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들이 보이는 것으로보아 황사때문인듯하다. 잊고 있었다. 지겹도록 파란하늘. 올려다보는 하늘에 걸리는 것 하나 없이 파란 하늘이 넓디넓은 땅덩어리마냥 사람을 질리게 했는데 흐린 서울의 하늘은 쨍한 뉴욕의 하늘을 그립게 한다. 창밖으로 보이는 오늘의 하늘 역시 흐리다. 나는 용기를 낼 수 있을까? 하늘만큼 흐린 내 삶에 나는 다시금 용기를 내어 말을 하고 첫 발을 디딜수 있을까? 나약했던 지난 날의 나의 모습. 아니 비단 지난 날이라 말할 수 있을까. 오늘의 나는 나약하지 않은 것일까? 모든 일의 어긋남의 시작은 작고 미묘한 그 무엇이다. 우리의 운명을 흔들 그 무엇은 결코 요란스럽거나 크나큰 그 무엇이 아니지 않은가? 서투른 마음과 말이, 불안전한 자신으로 인해 시작되는 튀틀림의 시간들은 나는 얼마나 극복해나갈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인 그 장소일지라도 구성원이 달라지면 분위기가 바뀌듯 장소와 시간은 변하지 않을지라도 의미는 달라져버린다.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임을 변함없는 사실이지만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내가 아닌 것 또한 마찬가지니깐 말이다. 모든 것이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