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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를 베푸소서.

huuka 2024. 3. 26. 00:54

죽음을 당한 예수를 한 쪽 무릎에 눕힌 마리아를 형상화한 피에타조각상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혹자는 자식을 앞세운 어미의 애끓는 한이라 표현하고, 혹은 절제된 슬픔의 가장 극대화된 성스러운 조각상이라 말하는 이도 있다. 이렇든 저렇든 고난주간에 피에타를 바라보는 것은 많은 생각을 갖게 하는데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 수 밖에 없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유한한 인간의 이해를 위해 육신의 어머니로 등장한 일은 옳다. 고난주간이 시작된 월요일 새벽 목사님의 말씀은 피에타로 시작한다. 애절하고 안타까운 어미의 마음. 어미로 살아가야하는 나에게 이 말씀이 각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오늘은 막둥이의 생일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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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각상이나 그림에 대하여 잘 모르는데 피에타의 해설을 읽어보면 처참한 아들예수에 비해 성모마리아의 얼굴은 그 어떤 고통도 찾아볼 수 없는 평온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그 평온은 단순한 감정적 평온이 아닌 극도로 그 슬픔이 절제되어 감추어진 비애와 궁극에 이르는 거룩함이 표현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잘 모르겠다. 극한 공포앞에서는 "악"하는 비명이 나오지 않고 큰 슬픔중에는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오히려 중세 신학자 성 보나벤투라는 저서《그리스도 삶에 대한 명상》에서 성모 마리아의 고통에 대한 설명이 오히려 더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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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이리저리 그리스도의 손과 옆구리에 난 상처를 바라보았다. 그리스도의 얼굴과 머리를 바라본 마리아는 가시관의 흉터를, 쥐어뜯긴 턱수염을, 침과 피로 더러워진 얼굴을 응시하였다. (중략) ‘무릎에 앉고 있는 나의 아들아, 너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네 자신을 희생하였구나. 나는 기뻐해야 할 이 구원의 행위가 너무나 고통스럽고 괴롭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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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막둥이 생일이다. 막둥이는 선물처럼 내게 주어졌지만 온전히 기뻐하지 못하는 자식이다. 이생명을 통해 많은 것들을 얻었지만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고, 그에게 상처를 준 이상으로 내 인생에 아픔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매일매일 전쟁같은 하루를 시작하고 축복의 말보다 원망을 쏟아 부을 수밖에 없는 자신을 어쩔수 없음으로 포장하기에 급급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최선은 한 인생으로 설 수 있도록 자리를 지켜주는 것인데 그것이 참 쉽지 않다. 막둥이를 위한 마지막 선택으로 나는 태평양을 건넜다. 그러나 지금에와 생각해보면 딱히 막둥이에게 덕이 되는 선택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막둥이로 인해 포기해야 했던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나는 참지않고 막둥이에게 모진 말로 토설하고 아이에게 보상받기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특유의 느림으로 그것들을 견디며 애써 모른척한다. 우리는 그렇게 이 시간을 지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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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까닭에설까. 지금 내가 바라보는 피에타에 관한 생각은 안으로만 삭히는 절제된 감정보다는 토설하며 절규하는 보나벤투라의 시선이 훨씬 가깝다. 아이를 보는 나의 마음은 언제나 아픔을 동반한다. 온전히 기뻐하고 즐거워했던 적이 과연 있었을까? 아프게 태어난 아이는 오롯이 고통을 동반한 체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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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아이를 위해 손을 모을 뿐. 피에타의 의미가 "자비를 베푸소서"로 안다. 토설하지 못하는 어미는 처참한 아들을 안아든체 다만 읊조릴 뿐. "전능자여 자비를 베푸소서. 당신의 아들이오니 자비를 베푸소서." 그렇다. 무력한 어미인 나역시 그렇게 아뢸수 밖에 없으니 "아버지여. 전능자여. 이아이에게 자비를 더하소서. 당신의 자비의 옷자락으로 덮으시고 당신의 자비로 아이의 삶을 이끄소서." 막둥이의 삶이 온전히 그분의 계획하심아래 그분의 인도하심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