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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박한 애정

huuka 2024. 3. 21. 22:38

"어디서 불경스럽게"
어릴적 국경일마다 대문앞에 태극기를 내다 달았다. 네모난 종이박스에 마치 다림질이라도 한듯 구김없이 담겨있던 국기를 갓난 아이 다루듯 조심스레 꺼내 두손을 바쳐 게양했다. 하루 해가 저물고 기를 내릴 때도 마찬가지다. 탁탁 털어 네모서리를 맞추어 접어 상자에 넣었고, 손이 타지 않는 서랍장이나 장롱위에 올려두었다. 만약 기를 내려 꾸깃꾸깃 박스에 구겨 넣기라도하면 ,
"어디서 불경스럽게!" 엄마의 꾸중을 들었다.  나에게 있어, 아니 우리 세대에 있어 한 나라의 국기는 그러한 것이었다. 성스럽고 소중한 함부로 해서는 안되는, 그런 까닭에 조금은 나의 손이 닿지 않는 먼 거리의 그 무엇이었던 셈이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태극기로 한 문양이나 여러 상품들이 들이 판매되고, 스포츠경기장에서 우승자들이 단순히 가슴에 손을 올리고 경건을 표하고 애국심을 발휘하는 것을 지나 온몸에 태극기를 두르고 퍼포먼스를 하는 것에까지 발전했다. 그게 무슨 진보야 하는 젊은 세대들이겠지만 그랬다. 가슴에 있어야 할 태극기가 온 몸, 가슴 아래로 내려오는 것은 불경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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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 옛날 사람들이 보면 거품을 물고 뒤로 자빠질 광경이 이곳에는 많다. 국경일이 아닌데도 집앞에 성조기를 게양한 것은 양반이고, 건물, 거리, 이런 곳에? 하는 생각이 드는 곳에도 그러하다.또한 마치 부서진 집의 한 부분을 가리기 위해 성조기로 갈무리를 해 둔 곳도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한 나라의 성스러운 깃발의 의미가 이곳에서는 생활지향적이라고 해야할까? 먼 곳에 두고 애국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내 삶 가장 가까이에서 나의 애국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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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타고 보게 된 길 모퉁이의 집. 온갖 성스러운 것들로 자신의 집을 감싸고 있다. 성조기와 하나님. 손에 닿지 않는 존재들을 자신의 집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둔 것이 아닌가? 이 건물이 한때 교회로 사용된 곳인지 알 길 없다. 건물주가 어떤 의도로 성조기며 하나님을 내 걸었는지는 모르지만 눈에 띄기 위한 의도라면 효과는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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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소중하고 성스러운 것은 깊은 곳에 감추어 둔다.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아끼는 마음인 것인데 이들의 생각은 다르다. 사랑하고 소중하다면 표현하라. 표현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내가 사랑하는 조국이기에 성조기를 달고,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이기에 그 이름을 둔다. 무엇이 옳다 할수 없지만 확연히 다른 우리네와 저들의 차이를 삶의 자리를 통해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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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로 풀지 못하는 문제는 없다는 말이 있다. 바꾸어 표현해 담아두면 상대방의 의중을 알 길 없다.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다 그러하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아끼다 보면 오해를 산다. 잦은 말로 그 가치를 떨어뜨릴수도 있지만 입으로 시인함은 신뢰단계의 일번지다. 죽고 나서 유품을 통해 아 그랬구나가 아닌 살아있을 때 더 많이 사랑하고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 때에는 이미 늦은 것이다. 사랑도, 한 나라의 깃발도, 하나님의 이름도 거룩하다. 속으로 감추어 아끼고 아껴 곰삭은 소박한 사랑이 진실이라 생각했지만 드러내 놓은 투박한 사랑이 결코 가볍거나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