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

엔도탄생100주년 - "바다와 독약"

huuka 2023. 6. 22. 11:20

- 엔도를 기념하며 다시 읽는 첫 번째 책 - 바다와 독약 -

< "바다와 독약", "침묵", " 깊은 강" >.

'침묵''깊은 강'은 엔도가 자신의 사후 관속에 넣어주기를 원했던 작품이고, 많은 이들이 읽고 사랑하는 책에 속한다. 그렇다면 '바다와 독약'은 어떤 책일까? 이 책은 '아덴까지' '백색인 황색인'을 잇는 엔도의 초기작품에 속한다. 서구 기독교와 일본적 영성사이의 거리감으로 방황하던 저자의 고뇌는 "백색인 황색인'을 통해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바다와 독약'은 황색인의 '죄의식 부재'라는 주제의 연장선상에 자리한 작품이다.

.< 바다와 독약 >.

"바다와 독약"1945년 미군포로를 대상으로 실제 행해진 큐슈대학 생체 해부사건을 배경으로 인간의 죄의식을 다룬 수려한 작품이다. 비교적 초기작품에 속해 다듬어지지 않은 엔도의 고뇌를 제대로 맛볼 수 있고, 새로운 문제의식을 가진 작품세계로 넘어가는 거가역할을 톡톡히 한 작품이라 나에게 있어서는 "깊은 강"과 더불어 최애의 엔도 작품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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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내용은 자치하고 (스포는 원치 않는다. 직접 읽어보시라.)제목과 엔도의 문제의식에 관해 다루어보고자 한다. 일본인에게 있어 아니 엔도에게 있어 바다나 강 즉 물이 갖는 의미는 독특하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일본의 습합(習合)문화에 관해 짚어보아야 한다. 복잡한 설명은 내가 가진 얄팍한 지식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기에 간단히 표현하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합쳐져서 새로운 것을 (가장 일본인다운) 만들어내는 문화변용이라 말할 수 있다. 그 변용이 일어나는 모태가 "" "습지"가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가지는 원형적 상징인 정화, 생명, 구원의 의미가 엔도의 작품속에서는 구원의 의미를 가지되 변용된 의미 "희석되고 해독되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이에 관하여 김승철교수는 그의 책 < 엔도슈사쿠 흔적과 아픔의 문학>P183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엔도는 '바다'라는 메타포를 통해 예리한 서구 기독교적 죄의식을 희석시키는 일본적-범신적 풍토를 전면에 부각시킴과 동시에 그런 '바다'는 서구 기독교의 이질성을 빨아들여 동양화 시키는 세계임을 주제화한 것이다....바다는 현실에 존재하는 악과 죄를 아시아적으로 해독시키는 방법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제목에 나타난 독약은 무엇일까? 김승철교수의 같은 책 같은 페이지에는 이렇게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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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약이라는 말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 그 자체다. 그것은 '그만두려고 한다면 그만두라'고 했지만 생체해부에 응하고 말았던 신 없는 일본인의 정신 풍토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다는 언제든지 독약을 자신 안으로 집어넣어 용해시켜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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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나 우리나라나 동양적 관점에서의
"죄의식"""앞에서 느끼는 죄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사회적 안목, 타인의 시선"에서 느끼는 죄의식이다. 이것은 암묵적으로 사회적 묵인이 이루어진 혹은 대의를 위한, 드러나지 않는 죄에 대해서는 죄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이러한 배경은 체념과 마비된 양심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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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든 저것이든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생각하지 말자. 잠이나 자자. 생각해본들 별도리도 없다. 나 혼자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세상인 것이다."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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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나는 자신을 양심이 마비된 남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내게 양심의 가책이란 지금까지 쓴 대로 타인이 눈이나 사회의 벌에 대한 공포일뿐이었다. 물론 자신이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누구라도 한 꺼풀만 벗기면 나와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연의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 벌을 받거나 사회의 비난을 받을 일은 없었다.P130 / 간통만이 아니었다. 그것에 죄책감을 별로 느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 특별한 일에 대해서도 무감각했다.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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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는 죄에 대한 부재
, 체념과 무감각을 비단 생체시험에 참가한 이들만의 문제로 규정하지 않는다. 아무 일 없었던 듯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 그 이면에도 참전하여 허락된 살인을 저지르고 종전뒤 아무렇지 않은듯 살아가는 내 이웃의 모습속에서도 인간 내면에 깊이 자리한 신의 부재에 의한 죄의 부재의식을 인간 전반의 문제로 확대시킨다. 세상과 사회의 벌만을 두려워하는 것에 반해 작용하는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에 대해서는 심한 피로를 느끼는 이들. 그렇다면 우리는 "바다와 독약"을 통해 무엇을 읽고 느껴야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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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시편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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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고 >.

불현듯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오버랩된다. "신앞에서는 유죄이지만 법앞에서는 아니다."라는 아이히만의 주장이 떠오른 까닭일까. 악의 보편성가운데 생각하기를 멈추는 체념은 사고의 능력을 창조시 부여받은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행위다. 오늘의 사회역시 사고의 능력을 체념하게 만드는 다양한 환경이 있다. 그것은 오직 전쟁만이 아니다. 사람들의 여론, 소속되기 위한 암묵적 단결. 드러나지 않은 죄에 대해서는 철저히 양심의 소리에 귀를 닫는 행위. 대의가 정의가 되지 않고, 정죄함이 양심이 아니다. 우리는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내가 두려워 하는 것은 무엇인가?" '타인의 죽음 혹은 타인의 고통에 침묵하고 있지는 않은가?" "연약한 자,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미군포로와 같은)자들을 정의 혹은 대의라는 이름으로 정죄하고 그들의 고통을 모른 척 하고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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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삶의 모습으로 살아가다보니 모든 것이 무감각해졌다. 양심은 이미 화인맞은지 오래고 신의 부재를 외치며 굽어진 내 인생을 바라본다.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그들의 평범이 나에게는 멀다. 드러나지 않은 죄속에 숨은 그들이 드러난 수치의 삶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이에게 정의라는 이름으로 성경이라는 말로 질책하고 정죄한다. 진정한 양심은 신앞에서 죄스러움과 사람앞에서의 부끄러움이 함께 드러난다. 내 삶은 신앞에서 원망과 사람앞에서의 변명과 외면으로 얼룩져있다. 나는 전능자에게 곡진한 기도를 올리며 말씀을 읊조린다."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그리고 나를 지켜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