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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나시

huuka 2022. 12. 29. 06:25

갠지즈강에서 떠오르는 해를 유일하게 볼 수 있다는 바라나시.
나의 22살 여름, 요가에 심취한 이종사촌이 인도 여행을 제안한 것은 그녀가 이미 3차례의 인도를 방문한 후였다. 그 시절은 배낭여행이 한창이었던 때였고, 거쳐 지나가더라도 세계 곳곳을 다니는 것이 유행이었던 터라 한 나라를 거듭 방문한다는 것은 왠만큼 그 나라의 매력에 빠지지 않고서는 드문 일이었다. 나로선 인도가 처음이었고, 그녀의 적극적인 권유와 그녀의 재방문이라는 보증수표에 힘입어 망설임없이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공항에 내리는 순간. 나는 인도에 온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무질서를 넘은 혼돈 그 자체인 이 인도를 내가 감당해 낼 수 있을까? 여행지에서 느끼는 막연한 두려움과는 확연히 다른 후각으로부터 느껴지는 거부감을 쉽사리 떨쳐낼 수가 없었다. 델리에서 바라나시까지의 야간열차은 두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혼돈과 소란 그 자체였다. 인도 예찬론자인 이종사촌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올 때 즈음 미로처럼 이어진 골목에 도착해 있었다. 힌두교인들의 성지로 일컫는 바라나시는 내게 충격그 자체였다. 그들의 신성함과 그들의 거룩함은 불결과 혼돈으로 각인되어 한 끼도 제대로 목구멍에 넘기지 못했고. 일주일 내내 나는 구토와 신열에 시달렸다.

" 다릅니다. 목욕재개는 죄의 더러움, 몸의 더러움을 정화하기 위한 행위이지만 갠지스 강의 목욕은 정화와 동시에 윤회 환생으로부터의 해탈을 기원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엔도슈사쿠 / 깊은 강 / p 161.
"갠지스 강을 볼 때마다 저는 양파를 생각합니다. 갠지스 강은 쏙은 손가락을 내밀어 구걸하는 여자도, 암살당한 간디 수상도 똑같이 거절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재를 삼키고 흘러갑니다. 양파라는 사랑의 강은 아무리 추한 인간도 아무리 지저분한 인간도 모두 거절하지 않고 받아 들이고 흘러갑니다. " 엔도 슈사쿠 / 깊은 강 / p 280
" 두 사람 바로 밑에서는 장밋 빛 아침 해를 온몸에 받으며 갠지스 강물을 입에 머금고 알몸의 남녀가 나란히 합장하고 잇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생이 있고 타인에게 말 못하는 비밀이 있고, 그리고 그들은 그걸 무겁게 등에 짊어지고 살아간다. 갠지스 강에서 정화해야만 하는 무언가를 그들은 갖고 있다." 엔도 슈사쿠 / 깊은 강 / p298

이곳에서 가장 큰 위로는 매일밤 작은 욕조에 뜨거운 물을 채우고 몸을 담그는 것이다. 하지만 사용하는 물, 전기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다보니 몸을 담그고 그 물에 머리를 감고, 그 물에 그날 입었던 옷 세탁까지한다. 몸을 씻으면 물표면에 어느새 비누와 얽힌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 세포들을 본다. 하얀 기포에 감싸인 명(命)을 다한 세포들. 그 죽음의 껍데기들은 새로운 생명을 입은 몸과 한 욕조에 있다.나는 이 욕조에 앉아 바라나시를 생각했다. 그들의 거룩한 성지에 비할 바 아니었지만. 나는 밤마다 욕조에 몸을 담그는 이 행위가 갠지즈강에 몸을 담그는 그들의 신령한 의식처럼 거룩한 의식으로 여긴다.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욕조표면에서부터 눈에 띄기 시작하는 죽은 세포덩어리는 불결하게 느껴졌다. 씻어 내 버려야 하는 그 무엇에 다시 머리를 감고, 옷을 빠는 행위는 깨끗함과는 거리가 먼 어쩔수 없는 가난과 밑바닥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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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날 물수면의 높이와 동일한 욕조의 표면부터 누런 세포와 허연 비누거품을 보는 순간 갠지즈 강에 입을 헹구고 몸을 씻던 바라나시의 광경이 떠올랐다. 죽음이 임박하면 그들은 바라나시로 향한다고 했다. 죽어서라도 안기고 싶은 곳이 바라나시를 흐르는 갠지즈 강이라 했다. 그곳에는 일평생 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키는 화장터가 있었고, 매캐한 연기와 병자들의 신음과 해독불가한 기도의 목소리가 동일한 음파로 귀에 전해졌다. 악취. 불결. 성속이 혼재하는 혼돈. 인간의 생로병사의 고통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라나시였다. 20대 경악함으로 두번 다시 찾지 않았던 바라나시. 나는 50이 넘어 뉴욕의 작은 욕조안에서 그 바라나시를 불현듯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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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불결한 물에 몸을 담근다는 단초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피곤한 몸이 뜨거운 욕조안에서 회복을 입고, 물위에 둥둥 떠다리는 죽은 세포는 새롭게 살아나는 세포에 기꺼이 자리를 물려준다. 하루가 저물고 새로운 날을 맞이할 수 있는 곳, 하루의 고단함으로 오늘의 내가 죽고 지난한 삶일지라도 이어갈 내일의 내가 태어나는 곳. 나는 매일밤 뉴욕의 작은 욕조가 아닌 나만의 바라나시를 향하고 그곳에 몸을 담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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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나시를 떠올린 날 나는 엔도의 "깊은 강"을 다시금 읽기 시작했다. 그의 글을 통해 나의 신앙함이 지극히 일본인의 것이라는 것을 떠올린 순간. 언젠가 그가 내게 했던 말이 오스가 신부들에게 들었던 말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범신론에 가까운 내 신앙. 모든 것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내 마음에 있는 그분은 당신의 마음에도 계시지만 내가 느끼는 이 자연. 만물에 깃들어 있다. 어둡고 비난에 노출되는 삶이 길어질수록 자기변명이 늘어가는 까닭이겠지만 삶의 다양한 모습속에서 어느 누구도 한 사람의 인생에 어떠한 잣대를 들이 댈 수 없다는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거꾸로 악행에도 구원의 씨앗이 깃들어 있다. 무슨 일이건 선과 악이 서로 등을 맞대고 있어서 그걸 칼로 베어 내듯 나누어선 안 된다. 분별해선 안 된다."
엔도슈사쿠 / 깊은 강 / p300
"믿을 수 있는 건, 저마다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아픔을 짊어지고 깊은 강에서 기도하는 이 광경입니다."
엔도 슈사쿠 / 깊은 강 / p316.

나만의 바라나시행위가 거룩한 의식으로 자리 매김하는 것은 하루의 죽음과 새날의 생명이 전능자를 향한 기도와 더불어 아픔과 죄됨을 짊어지는 행위가 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나만의 바라나시를 찾아 마지막 발원기도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