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령(嶺)에는 나무가지를 흔드는 비와 바람이 있다. 몇 번의 비와 몇 번의 바람의 문턱을 지나면 자신의 몸보다 큰 얼굴을 가진 수국이 핀다. 수국(水菊)은 초 여름에서 무더운 여름 중순까지 피는 꽃이다. 꽃말은 수국의 색만큼이나 다양하다. 냉정, 냉담과 무정,변덕, 변심인데 초여름의 변덕스런 기후변화를 반영한 꽃말인듯하다. 또,다르게 진실한 사랑, 처녀의 꿈, 진심,인내심이 강한 사랑이라는 꽃말도 존재한다. 왠지 후자의 꽃말에 마음이 가는 건 이 더위속에 시원스레 꽃대를 올리고 작디작은 꽃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부케로 보이는 것이 인내심이 강한 사랑이라는 꽃말이 훨씬 어울릴듯하다.
꽃의 색으로 토양의 pH를 확인할 수 있는데, 정상토양에선 핑크색, 산성토에선 푸른색을 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한 토양아래 다양한 수국밭을 바라보고 있자니 심는이가 그 뿌리에 산성토를 일부러 넣어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위가 만든 자연의 정원에서 하늘을 향한 꽃들의 기도와 땅에 힘있게 내린 뿌리의 기도에 조용히 귀 기울인다. 이제부터 피기시작한 꽃들이 피고지고를 반복하며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고 이 꽃을 바라보는 동안 시간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갈 거란 것을 안다.
귀한 녀석을 만났다. 얼마나 야무지게 갉아서 속살만 먹는지 먹는 법을 누구에게 배웠을까? 대지의 어머니가 나무의 신령이 바람이라는 친구가 가르쳐준 것일까? 투명하니 반짝이는 두눈과 주위의 소리에 민감하니 움직이는 뽀족귀가 귀엽다. 얼마나 맛났으면 껍질이 땅으로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먹고 있었을까? 나무에서 떨어지는 껍질이 비라도 내리는 줄 알고 올려다 본 곳에 청설모가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한 없이 쳐져 있다가도 눈깜짝할 사이 모습을 감춘 녀석을 필터에 남은 것만으로도 하루의 행운에 내게 임한 듯 그 마음이 가벼워 질 수 있다는 게 참 놀랍다. 고마운 녀석. 또 만날 수 있을까나.
돌담과 들장미. 피기시작한 석류나무꽃이 담쟁이와 이루어내는 조화가 그 어떤 그림보다도 사진보다도 아름답다. 자칫 조잡하거나 촌스러워보일 색조합이 자연에서는 천연덕스레 어울리고 태고적 신비를 간직한 전설이 되어버린다. 넋을 잃고 보게 되는 장면은 늘 그렇다. 어떻게 저게 저기서 자라나고 피어났을까? 화려한 자태를 가진것도 아닌 수수한 그 모습으로 담장에 얹혀져 잡풀처럼 자라난 담장이랑 자기 짝마냥 어울리게 피어나서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듯 전해지는 평온. 마치 밀려왔다 밀려나가기를 반복하는 바다의 파도처럼 그들만의 이야기가 바람속에 세대를 건너 전해진다.
내게 너무나 소중한 이계절이 속절없이 지나가서 속없이 계단에 앉아 울고 말았지만 많이 걷고 많이 보고 사진으로 많이 남겨야지. 마음은 조금씩 정리가 되어간다. 사랑도 미움도 변명도 좌절도 한 파도씩 지나가고 나니 남는 건 살아내었다는 것 하나. 그 시간속의 나역시 부인못할 나였고, 지금의 나역시 그러하듯 내일이 주어져 그 하루도 살아가야 할 나라면 나일 것이니까 그것으로 충분하다. 산산히 부서진 것들을 새롭게 부쳐보려하다 그냥 쓸어모아 한 곳에 두기로 했다. 그러길 잘했다고 생각할 때가 언젠가 오리라 생각한다.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
이제 피기 시작해서 한참을 더 부풀려갈 얼굴. 조금더 색은 짙어지겠지. 너만의 아름다움으로 곱게 피어나거라. 널 응원한다. 아니 추앙한다. 내게는 이땅의 마지막 계절이 될 이 시간을 느긋이 즐길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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