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다. 추워도 이렇게 벌써 추워지면 안되는거 아닌가?
풀지 않았던 박스에서 막둥이 롱패딩을 꺼내입고 아이합(ihop)으로 갔다. 5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어둑어둑해진 거리. 버스 정류소에도 사람이 없다. 오늘은 저녁을 야무지게 먹고 싶었다. 아니 내일부터 3일간의 뒷일들을 해 내려면 먹어야한다. 이곳에 오고서 밥양이 늘었다. 몸을 쓰는 일을 하면서 양이 늘었다. 아니 늘렸다고 해야 옳다. 힘이 딸려서 일을 해 내기가 어려웠다. 밥힘이라는 말을 이제야 경험하고, 밥힘으로 일한다는 말도 이제야 인정하게 된다. 내일부터 막강 한파를 이겨내려면 더더욱 든든히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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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라면 빵한조각이면 되지만 오늘은 콤보. 계란이 두개에 헤쉬포테이토까지 든든하다.
이곳은 매니저가 스페니쉬인지 직원 대부분이 스페니쉬다. 이들의 영어발음은 좀더 톤이 높고 마치 중국어의 사성처럼 독특한 억양이 느껴져 가뜩이나 못 알아듣는 영어가 더 힘들다. 급기야 구글까지 돌렸지만 구글조차 주문받으시는 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영어 못하는 내 탓만은 아닌듯. 뭐 어떠랴. 주문을 했고, 나는 달달 고소한 거기에 해피아워로 한 끼를 텍스포함 14불에 먹었으니 대만족이다.
먹는 내내 뒤통수가 시끄러워 소리의 근원을 찾으니 주방쪽이다. 분명 텔레비전에서 중계되는 월드컵경기인데, 바쁘게 눈을 움직여도 모니터를 찾을 수 없다. 헉 이건 무엇인가? 세상에. 주방을 향한 등돌린 텔레비전이다. 텔레비전이 손님을 위한 것이 아닌 직원을 위한 것?. 과연 축구에 진심인 남미사람인 까닭이기도 하겠지만 비단 월드컵 때문만은 아닌 원래 그렇게 고정되어 있는 것이었다. 또다른 문화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일하는 사람들이 과연 그래도 된단 말인가? 한국적 사고로는 이해되지 않는 점이지만, 일하시는 분들이 한 가족처럼 일하는 것을 보니 이들에게도 타국인 이곳에서의 생활이 외롭고 고달파보이지 않아 다행이다는 마음이 든다. 이곳을 찾는 또다른 스페니쉬손님들은 아이에서 어른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땡큐가 아닌 감사 인사가 달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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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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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 자비의 뜻을 가진 말로 스페인어로 "감사합니다."라는 말이다. 그라시아를 주고받는 이들의 얼굴에 깃든 평화는 이 땅의 것이 아닌 참 평안이 느껴진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 길 나는 서빙해준 그녀에게 "그라시아"를 전했고, 웃음이 가득한 그녀는 "그라치아"라고 되돌려준다. 차가운 바람이 조금은 따습게 느껴지는 까닭은 감사의 말에 담긴 신의 은총과 자비때문이 아닐까! 그래도 확실히 춥다. 두텁게 입고 일하러 가야겠다. 3일간의 고역뒤 난 얼만간 아플 것이고 그래도 달디단 꿈을 꾸겠지. 그 꿈을 위해 난 오늘 실하게 먹고, 먼 곳에 있는 신의 자비와 은총을 그라시아를 읊조리며 간절히 간절히 바란다.